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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Jun 09. 2019

#6 더 뜨거웠어야 했다, 당신과 나는



적당함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었다. 지옥은 안락하지 않았다. 지옥일 뿐이었다.


당신과 나를 제외한, 그 어느 것도, 적당하지 않았다.


Edvard Munch, Ashes, 1894, Nasjonalmuseet, Oslo





적당한 당신은 내게 또 만나자고 했다.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적당한 당신과 나의 관계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렇게 나는 적당한 지옥의 문을 열었다.

당신과의 세 번째 만남은 내게 중요했다.
당신이 내게, 그 빈 공간을, 상처를 이야기하리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늘 그 빈 공간을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두 번째 만난 날은 더 그랬다. 소주를 마시며 당신은 그 빈 공간을 내보일 듯 했다. 어쩌면 당신은 나를 떠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적당한 여자가 되었다.

심지어 당신은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난다고 했다. 마음 속은 온갖 질문이 쏟아졌다.

이제 연애가 막 시작되려 하는데 주말에는 나를 안 본다고?
주말에 잠깐이라도 나를 볼 시간이 없다고?

그럼 내일은 왜 나를 잠깐이라도 안 보는거지?
그럼 또 일주일쯤 뒤에 보자는 건가?
그래서 언제 볼건데?

나는 이 질문들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당신은 주말에 친구들을 만났다. 그 어떤 연락 한 번 없이.


적당하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당신과 나의 만남은 간격이 길었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긴 것은 아니다. 다만 장거리 연애도 아니고 세상 일을 혼자 다하지도 않는 이상, 일주일은 길었다. 특히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주말에 만나는 친구가 다른 여자일 수 있다고 생각 했다. 그 친구가 오래 사귄 여자친구이거나 새로운 여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역시 바로 그런 상태였다. 나 역시 10여 년을 만난 당신을 두고 이렇게 새로운 당신을 만났으니까.


나는 이렇게 적당하며 미적지근한, 불성실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10여 년을 만난 당신은 우직할 정도였다. 내가 잠깐씩 만난 일시적 당신들은 말 그대로 뜨거웠다. 그들은 내가 질식할 정도로 연락을 해주었다. 사실 나는 자주 연락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생존 문자만 보내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 나는 처음으로 연락 문제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고민하게 하는 당신을 만나지 말았어야했다.

나는 고민되게 하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그게 누구든. 불성실한 당신은 날 미치게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미 적당한 당신에게 홀렸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불성실함을 적당함으로 세뇌시켰다. 아직 처음이라서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적당하다고.
그렇게 나는 적당한 지옥을 걷고 있었다.


세 번째 만날 약속을 정하기로 했다.

온갖 잡념과 함께 주말을 보내고 지친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약속을 잡았다. 보란듯이 내 방식대로 했다.

나는 약속을 잡을 때 미리 확실하게 약속장소와 시간을 결정한다. 피치못할 상황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는 남녀에게 서로 간의 약속을 갑자기 미룰만큼 더 중요한 게 있을까. 하긴 당신에게는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과 약속을 잡을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확실하게 결정했다. 의외로 당신은 그런 나를 매우 몹시 반겨주었다.
주말 동안의 잡념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약속을 잡고나서 나는 당신처럼 행동했다. 연락을 먼저 하지 않았다. 당신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았다.

Auguste Toulmouche, The Love Letter, 1863, 소더비



예상치 못하게 당신이 내게 전화를 했다.

핸드폰 화면에서 당신의 이름을 본 그 찰나, 나는 수만가지 고민을 했다.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별것 없는 대화였다.

적당하지 않았다.
너무나 특별했다.
설렜다.

당신과 내가 여느 연인들처럼 느껴졌다. 내가 당신을 만나며 원한 게 바로 이거였다. 여느 연인같이 바쁜 일정 중에 시간을 내어 일상을 나누는 것.
이 전화가 그런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날 밤 나는 잠을 들 수 없었다.


봄처럼 나를 포장했다, 당신도 그랬다.

마침 날씨도 겨울이 아닌 듯 봄이 온 듯 했다. 봄처럼 꾸몄다. 그날 나는 지난 10여 년 간의 나와 너무나 달랐다. 그리고 당신의 반응은 내 예상대로였다. 당신은 포장된 나를 몹시 반겼다. 나를 보는 당신의 눈빛은 반짝였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화려한 삶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삶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당신의 상처를 알고 싶었다. 그렇지만 묻고 싶지는 않았다. 물을 수도 없었다.
내게는 당신이 상처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있었다.
비로소 당신이 내게 마음을 연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내 당신은 그 빈 공간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내게 그 빈 공간을 말 해주었으면 했다.
세 번 만난, 이제 막 연인이 된 여자에게 상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런데 당신과 나는 맞선으로 만났다. 결혼을 전제로 한 바로 그 맞선이었다. 당신과 내가 한 번만 더 만나도 양가의 기대가 커지는 그 맞선. 곧 마흔인 두 남녀가 맞선 두 번만에 결혼을 결정할 수 있는 바로 그 맞선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세 번을 만나는 중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오래 전 잠깐 만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의 상처를 짐작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는 그 빈 공간을 끝내 이야기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지쳐서 헤어졌다.

내게는 그 빈 공간을, 그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했다. 무엇보다 당신은 매번 그 빈 공간을 말할 준비를 하고왔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내가 묻지 않음을 방패로 결국 말하지 않았다.

그때 당신과 나는 호퍼의 그림과 같았다. 당신과 나는 함께였지만 이미 각자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외로웠다.


Edward Hopper, Room in New York, 1932, Oil on canvas, Sheldon Museum of Art




나는 외로움이 주는 신호를 무시했다. 외로움도 적당한 거리라고 여겼다.

그때 나는 너무나 오만했다.
내 오만은 나를 적당함이란 이름의 지옥 속에 빠뜨렸다.



적당한 간격, 적당한 일주일, 적당한 전화, 적당한 사이... 적당한 상처까지.

그 어느 것도 적당하지 않았다. 아니다. 그 어느 것도 적당할 수 없었다.

간격은 더 짧았어야했다.
연락은 더 많았어야했다.
무엇보다, 당신과 나는, 더 뜨거웠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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