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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Jul 15. 2019

#35 아이처럼, 사랑 앞에서 솔직할 수 있기를.

비록 사람 앞에서는 방어적일 지라도, 사랑 앞에서는 아이처럼...!



Mary Cassatt, After the Bath, c. 1901, The Cleveland Museum of Art.



아이들은 감정적으로 솔직하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더 솔직하다. 특히 감정적으로. 내 생각에는 아이들이 훨씬 더 예민한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본인들을 사랑하는 사람 혹은 학대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을 매우 잘 알아차린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결혼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아이들을 같이 만나게 된다. 태어난 지 100일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서 초등학생이 된 아이까지 매우 다양했다.     

어린 아기일수록 내가 본인을 좋아한다는 것을 더 잘 알아차렸다. 나 역시 사람인지라 모든 아기가 사랑스럽지는 않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의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내게는 마냥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아기들과 놀다가 헤어질 때가 되면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아기는 울기도 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 아기들이 내가 본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렇게 울고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는 것을.          

 

아이들은 이렇게나 솔직하다. 아이들은 표정과 행동에서 감정이 금방 드러난다.  카삿 Mary Cassatt의 그림 속에 있는 행복해 보이는 모습일 때도, 지루해 보이는 모습일 때도.      

아이들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할 때, 즐거워하며 자주 웃는다. 기분이 좋으니 애교도 자주 부린다. 이것저것 호기심도 많고 질문도 많이 한다. 가끔은 질투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는 더 솔직하다. 가지 말라고 말하며 가지 말라고 붙잡는다. 다음을 약속하며 울고 떼쓴다. 

반대의 경우도 같다. 아이들은 자신을 미워하거나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예 근처에 가려고 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Mary Cassatt, Little Girl in a Blue Armchair, 1878,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나이가 들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감정 표현이 어려워졌다. 이유는 많았다. 감정 표현을 하고 나서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말을 옮기는 사람 때문에 욕을 먹게 되기도 했다. 가끔은 거절을 당한 데에서 오는 상처도 생겼다. 

또 가끔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나서 후회하게 되기도 했다. 상처를 준 기억은 내가 상처를 받은 기억보다 더 오래 남았다. 

이렇게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시간이 반복되면서, 결국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말 자체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던 것도 같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사회에서도 감정을 드러내면 마치 사회생활의 낙오자로 여겼다. 가끔은 감정을 드러낸다는 사실 때문에 프로답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내게 본인의 감정을 분출했던 것 같다. 그는 아마추어였고 아마 여전히 아마추어일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는 웃음으로 무장한 채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웃음은 사회생활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일시적으로는 친구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게다가 침묵이 금이라고 여기고 가능하면 불필요한 대화 자체를 피했다.      



나는 그렇게 어느새 완전한 방어형 인간이 되었다.      

(쓰고 보니 다 남의 탓, 사회 탓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사회라는 공간이 딱 그랬다. 학교도 과연 예외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러면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경험상, 나와 안 맞을 것 같으면 무조건 피한다. 대체로 이런 류의 감은 대개 맞지 않나?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이 모든 불쾌함을 상쇄할 좋은 사람들이 있다. 다만 내 사람이라고 생각되기 전까지는 결국은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 앞에서는 방어적이어도, 사랑 앞에서는 아이처럼.      


적어도 공적으로 사람을 만날 때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회생활에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하는 것은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 

사회생활에서 감정을 드러낼 때는 대개 좋은 감정일 때가 아니다. 그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게 되면서 누군가는 상처를 받게 된다. 심지어는 전혀 무관한 누군가에게 그 감정을 해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누군가는 내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방어적인 것은 당연하다. 나도 내 감정을 지킬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앞에서, 나도 늘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아이처럼, 감정적으로 솔직한 게 좋은 것 같다. 아니 감정적으로 솔직해야 한다. 

내가 솔직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솔직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내가 방어적이면서 상대에게 적극적이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이기도 하다. 

상대의 감정만 소모되는 것이지 않은가. 

상대에게만 솔직하기를 바라고 본인은 방어적인 것은 상대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결국 상대를 지치게 한다. 



사실 사랑 앞에서 아이처럼 솔직하기는 어렵다. 사람 앞에서 솔직하기가 훨씬 쉽다. 

누구든 크든 작든 상처 하나쯤은 있다. 

이상하게도 사랑 앞에서는 더욱더, 다들 각자 사연이 있고 각자 사정도 있다. 

그래서 사랑 앞에서는 솔직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정말 이상하게도 사랑 앞에서는 더 주저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인 것 같다. 아이처럼,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사랑 앞에 솔직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어쩌면 어렵기에, 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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