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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 Mar 07. 2022

이스탄불에서도 식단표를 보는 여자

알레르기를 가진 너에게, 고달픈 국제 학교 적응기

 

 지훈이가 1월에 등교를 시작하고 어느새 3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한 지 어느새 두 달이 접어간다. 그동안 등교 일주일 만에 아들은 코로나에 확진되었고, 아픈 아들을 돌보다 나 또한 확진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 적응할 만하면 다시 시작되는 국제 학교의 방학으로, 두 달 동안 실제 아이가 다닌 학교 등교 일수는 거의 한 달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적게 다닌 학교 이건만 국제 학교의 학비는 실로 엄청난데, 국제학교 학비는 서울 4년제 사립대학 등록금과 비슷하다. 솔직히 회사의 지원이 아니라면 우리 가정의 능력으론 이스탄불에서 국제 학교 진학은 불가능하다. 학비를 지불하기 위해 남편의 월급을 엄청나게 사용한다면 가능하겠지만 그걸 지속적으로 버틸 능력도 지원 계획도 없다. 솔직히 내 주머니 사정으론 한국에서 받을 수 없는 우수한 국제 학교 교육을 아이가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남편의 주재원 결정을 지지한 것이었다.


  지훈이가 어리고, 해외에서의 삶이 힘들고 아들의 학습 성취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아이가 외국인을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애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이 아들 녀석이 비행기 타는 법은 제대로 알지 않을까 하는 아하하하. 결국 출발의 이유는 아들을 위한 것이 가장 컸다.

 



 아이는 다행히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에 거부감이 없었다. 이렇게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는 튀르키예 도착한 후, 나는 아이에게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기본적인 영어 표현을 하도록 연습시켰다. 화장실, 밥, 물 등 생존에 필요한 말들을 영어로 가르쳤고, 알파벳도 모르던 지훈이에게 하나씩 단어를 가르치며 A-Z까지 학습시켰다. 물론 이 덕분에 아이가 국제 학교에 잘 적응한 건 아니다.

 나는 다른 주재원들과 달리 아이를 오자마자 학교로 보내지 않았고, 나부터도 어색했던 동네 걷기부터 인근 마트까지 아들과 내가 여기 생활에 충분히 적응한 후, 학교로 갔다. 그래도 4개월 남짓, 이삿짐도 오고 제법 집의 구색이 갖추어진 후에야 아이를 학교로 보냈다. 다행히 지훈이는 학교에 잘 적응해 현재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 우즈베키스탄, 미국 등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과 함께 놀며 생활하고 있다.

 

 아들은 그렇게 EYFS(유치원 과정)에 입학했고, 9월에 튀르키예에 도착했음에도 어느 학교를 보내야 하는가에 대한 학교 선택의 고민과 과연 일반 공립유치원에 다니던 아이가 해당 국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리고 유치원 과정의 자비 부담, 학습을 위한 준비 때문에 1월에 등교하게 되었다.


 튀르키예에 도착한 지 4개월 동안 아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냈다. 집 앞 가게도 같이 가고, 늦잠도 늘어지게 자곤 했다. 때론 아침을 먹곤, 집 앞 쇼핑몰의 서점에 가서 책을 보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그때는 튀르키예도 코로나가 심하던 시기라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며 다녔고, 아무래도 그 탓에 마스크를 쓰고 사람 많은 곳으로 가는 대신에 집에서 아들과 단 둘이 하루를 보낸 시간도 참 많았다. 일 년을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헛된 것이 아니라 이 동네를 알고 적응해 간, 아이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안정을 준 소중한 멈춤이었다.




 교사로 오래 살다 보니 지훈이처럼 부모님의 사정으로 국제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친구들도 제법 있었다. 그때 가끔 겪는 문제가 바로 수업시수 및 학제 차이로 생기는 일이다. 튀르키예도 유럽의 학제와 동일한데, 유럽은 우리나라와 학기 운영이 다르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학기 운영 개편은 종종 중요한 이슈가 되기도 한다.


 한국은 1학기의 시작이 3월, 봄인데 반해 국제학교 및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대다수 학교는 1학기 시작이 9월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처럼 같은 해에 태어난 친구들이 모두 함께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9월을 기준으로 하여 학생의 학년 구분도 이루어진다. 그래서 유학을 가거나 학교를 다니다 중간에 국제 학교에 가게 된 경우, 그리고 국제 학교를 다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일반 공교육 과정을 밟을 때, 이 학제 계산은 중요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즉, 이수 과목의 차이와 수업일수가 차이가 있어 종종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녀가 나이가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인 경우, 진학에 문제가 없도록 해당 부임지를 떠날 때 철저한 서류 준비가 필요하다. 한국에 귀국한 후, 서류를 찾으려고 하면 국내 학교와 국제학교 간의 서류 차이로 종종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지훈이는 나이가 어리므로 다른 문제로 학교 선택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렇다. 알레르기 노출을 줄이기 위한 고민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이 심한 아이를 가진 엄마가 바라는 것은 오직 알레르기 항원 물질이 적은 공간인지를 확인하는 것, 혹시나 아나필락시스가 오는 상황에서 교사가 얼마나 이를 얼마나 빨리 알아챌 수 있을지도 중요한 문제였다. 아이가 나이가 어리고 영어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결국 지훈이는 교사당 학생 수가 적고, 비교적 다른 미국계 국제학교보다 초등 과정에 빨리 진입하여 학비 부담이 적은 영국계 국제 학교로 입학을 결정했다.   

 

 국제학교 생활에서 첫 번째 문제는 급식에서 알레르기 유발 음식을 섭취할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것과 두 번째 문제는 실외화를 신고 생활하는 카펫 문화의 교실에서 아들이 집먼지 진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결론이었다.

 급식, 밥이 뭐라고 그러면 난 또 발끈한다. 터키식 아침식사, 카흐발트(Kahvalti)를 보면 아들이 왜  터키에서 힘든지는 단번에 알 수 있다. 터키인은 차이(Cay), 치즈(peynir), 각종 채소(sebzeler; 오이, 토마토, 파슬리, 올리브), 각종 잼과 빵(receller ve ekmek), 메네멘(menemen; 토마토와 계란, 약간의 고추와 볶은 음식)을 아침식사로 먹는다. 그런데 아들의 알레르기 유발 식품은 오이, 토마토, 감자, 깨다.

 특히, 참깨(susam)는 지훈이에게 독약과 같다.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간 빵집에서 겪은 다양한 고생은 아들에게 이곳에서의 학교생활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보여준다.


  나와 어린 지훈이는 빵집에 가서 앉아 있기를 즐겼다. 흔히 체인 빵집처럼 커다란 유리 창가 자리에 앉아 동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알레르기를 가진 아이를 데리고 예상보다 나의 고독 육아가 길어지면서, 아침 시간 다른 아이들이 어린이집 버스를 타거나 유치원 버스를 타고 가는 그 모습을 아이와 한참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아침잠이 없던 녀석과 이른 아침을 먹고 유모차를 태워 동네를 돌다가 목이 마르면 동네 빵집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나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물론 아들은 그때, 빵과 우유를 먹고 새로 산 스티커북을 열심히 붙였다. 참으로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돌아보니 그때 그 시간 동안 아이가 나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튀르키예에서 아들과 그때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빵(ekmek) 가게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고, 오븐에서 빵 굽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는 온몸을 긁었고, 그 잠깐 사이에 지훈이의 얼굴은 퉁퉁 부어버렸다.

 때론 참깨가 없다고 확인받고 빵을 샀지만 얼굴이 퉁퉁 부은 지훈이에게 두드리진 시럽을 급하게 먹여야 했던 일들도 있었다.

 몇 번의 고생 후, 그는 요즘 빵집의 빵은 거의 먹지 않는다. 굳이 먹고 싶다면 빵을 제조공장에서 만들어와서 정확히 재료를 알 수 있는 커피 전문점(스타벅#, 카페 네# 등)에서 사 먹는다.


 빵을 만드는 반죽에 깨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같은 오븐에 구운 탓인지 금세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곳의 빵은 깨가 정말 많이 들어간다. 이렇듯 깨가 가득한 시미트는 튀르키예가 그에게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시미트'라고 불리는 깨가 많이 들어가는 빵을 학교에서 아침마다 EYFS 학생들에게 준다. 그런데 아들이 반드시 피해야 할 식품 목록 1순위, 참깨. 그는 한 달이 넘게 참깨가 가득한 빵을 먹는 친구들과 함께 했다. 그는 갖가지 알레르기 증상을 나타냈다.


 처음엔 우리 아들에게만 대체식으로 다른 종류의 빵을 주었다. 그러나 반의 친구들이 시미트를 손으로 집어 먹는다. 빵을 손으로 먹지, 칼로 썰어먹진 않는다. 그리고 그 손으로 친구들과 같이 놀이를 하고 장난감을 만진다.

 나는 참기름의 천국, 한국에서도 가끔씩 쓰던 스테로이드제 연고를 여기에 와서는 거의 매일 써야 했다. 지훈이를 학교에 보낸 후, 나는 거의 매일 스테로이드제 연고를 그에게 발라줬고 또는 항알레르기 약을 거의 매일 먹여야만 했다. 그는 학교를 간 후부터 신기할 정도로 학교 갔다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귓불이 찢어지거나 때론 두드러기가 나고 밤이 되면 멀쩡하던 코도 다시 막히는 것이다.


 결국, 난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러려고 공부하는 거다. 배운 거 쓰려고 우리는 이럴 때 쓰라고 공부한다. 그렇다. 모두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공부하는 것이다. 아들이 적어도 학교에 가서도 잘 살게 하는 것이 엄마가 되어 살아보니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학교에 이 문제를 말하지 않으면 그들은 모른다. 상대에게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른다. 특히 문화가 다른 이곳에서 참고 있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 마음은 모르지만 번역은 잘하는 '파파#'의 도움도 받는다. 혹시나 내가 영작하다가 실수하면 다시 수정을 거쳐, 메일로 나의 마음을 줄줄 적어 내려간다.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바꿔야 할 필요성과 국제학교의 우수성을 증명하라는 칭찬인 듯 칭찬 아닌 요구를 적는다. 학교의 선생님과 학교 요리사에게 식단표의 문제점을 밝혔고, 학부모와의 의사소통의 필요성, 지훈이만 대체식을 주었을 때 생겨나는 문제점, 대안이 없냐는 물음으로 편지를 적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부터 시미트는 지훈이네 반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코가 막힌다. 협소 주택에 지어진 듯한 이스탄불 영국계 국제학교 시티 캠퍼스, 저학년의 교실은 가장 아래, 거의 반지하 같은 구조의 집, 햇볕도 들지 않는 구조, 과연 이만큼 학비를 내면서도 왜 이런 조건에서 아이가 다녀야 하는가에 대한 오늘도 고민한다.




 주재원의 아내들은 이야기한다. 같은 국제학교라도, 그 나라의 수준에 따라 학교의 질이 결정된다고 이야기한다. 튀르키예는 터키인이 직원이고 터키식으로 관리하고 영국계 교사는 그저 가르칠 뿐, 이곳의 수준은 튀르키예 학교라는 말이었다.

 한국 교육에 불만이 있는 분들께는 이해가 안되는 말이겠지만, 한국의 공교육은 세계의 어느 나라의 교육보다 그 수준이 높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아이가 일반 학교를 보내면 아이가 이상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나라의 공교육에도 문제가 많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곳에 온다면 한국의 공교육의 수준을 다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특히 튀르키예와 같은 개발 도상국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스탄불에서 나는 다시 느낀다. 여긴 튀르키예니까, 터키 법을  따라야지, 난 외국인 뿐이니 이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고 나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래도 등교 두 달만에 빵은 바꿨다. 몇 번의 편지를 썼고 이는 여러 사람을 거치고 거쳐 적용되었다. 입학 때 이야기했다고 그들이 다 아는 것은 아니다. 하나씩 더 좋아질 수 있다며 다시 외쳐본다. 나는 할 수 있다. 지치지 말자.

 

 아슬아슬, 때론 스스로를 응원하며 나는 지금 이스탄불에 살고 있다. 학교를 보내고 밤에 아들의 알레르기 반응에 온 가족이 못 자는 건, 한국에서나 튀르키예에서나 똑같다. 게다가 피부까지 변하는 녀석을 보니 그렇게 한숨이 나고 힘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학교를 보내고 난 오랜 시간 울어야 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지훈이의 피부 걱정까지 더해진 이곳, 튀르키예! 우기라서 거의 매일 비가 오는데, 습도도 제법 있고 네 피부는 왜 그런 걸까 고민해본다. 그렇구나. 넌 내 정성으로 멀쩡했구나. 그렇게 다시 좌절했다가 다시 힘을 낸다. 이렇게 감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지금도 식단표를 보며 이스탄불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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