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가 와서, 터키 집 주소를 불러달라고 묻는다면, 그렇다. 난 집 주소를 아마 틀리게 말할 것이다. 5개월을 살았건만 한국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주소를 줄줄 읽어대지 못하는, 그렇다. '##광역시 #구 #동' 이렇게 못 말하는, 난 아직 여기서 외국인이다.
터키어로는 난 야반즈(yabancı), 난 여기서 외국인으로 살고 있다. 터키어를 1월 말부터 배우고 있는데, 덕분에 예전에 안 들리던 나에 관한 수군거림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Etiler'de çok yabancı var.
(에틸레르엔 외국인이 너무 많아.)
한편으론 한 달에 일주일 2번, 아들 학교 가면 1시간씩 배웠는데 이만큼 들리다니 하고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 '야반즈'라는 발음의 뉘앙스 때문인가, 그게 썩 좋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알아들으니 9월에 느낀 두려움과 이거 외국인이라고 나한테 바가지 씌우는 거 아니야 하는 두려움은 없어졌다. 현재 나의 터키어 수준은 기초 인사, 자기소개, 숫자 1000까지 세기, 물건 사기와 관련된 대화, 형용사를 이용한 문장 만들기 등은 가능하다.
'아, 난 외국인이니까, 난 야반즈인데 뭘.' 이 뉘앙스 때문에 약간 건달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를 가르치는 터키어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내가 생각하는 그 뉘앙스가 맞다고 한다. 아하하하.
이 동네는 이스탄불의 전통적인 부촌인데, 선임 주재원의 아내들의 말론 우리나라의 청담동이라고 한다. 이스탄불에서 오래된 백화점 중의 하나라는 곳, 아크메르케즈(Akmerkez)에 10분 안에 걸어갈 수 있고, 자가용으로 졸루센터(zolu center, 명품샵이 있는 대형 쇼핑몰)에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뭐 내가 쇼핑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탓인지, 집에 오자마자 지옥같이 막히는 차들의 진열과 빵빵거림에 이곳에서 어떻게 4년이나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난 조용한 거리와 자연이 좋은 사람이라 번잡하고 시끄러운 차 소리가 처음엔 너무 싫었다. 그래도 5개월을 살아보니, 집 근처에 터키인이 다니는 초, 중, 고, 지하철, 쇼핑몰, 공원 등 내가 터키인이라면 이곳이 왜 살기 좋은 곳이라 하는지는 알겠다 싶은, 서울살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붐비고 바쁜 동네 같지만, 만나는 터키인마다 에틸레르에 산다고 하니,
" 그 동네 참 좋지?"
" 나도 살고 싶은 곳이야."
" 너, 잘 사는구나."
이런 류의 말을 서슴없이 던진다. 그래, 고맙다. 난 동의하지 않지만 신랑. 잘 골랐구나. 하하하하.
우리 아파트(site, 여기선 아파트를 site, '시테'라고 부른다)는 부자들만 사는 것 같다. 한 채가 한화로 22억, 억 소리 나는 비싼 집, 그중에 우리 집은 리모델링이 전혀 안된, 30년 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옛날 집을 월세살이하고 있다. 우리 옆집도 윗집도 아랫집도 새시 정도는 바꾸고, 아예 집 전체를 다 뜯어고쳐 요즘 스타일로 바꾼 집, 그중에서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 딱 주인이 안 사는 집, 그 집이 바로 우리 집이다.
사건은 결국, 옆집 아줌마의 텃세였다. 여기는 이슬람 문화라서 그런 걸까, 대다수가 창문의 커튼을 하루 종일 내리고 있다. 처음엔 왜 저러지 싶을 만큼 문을 다 내리고 있어서, 안 답답하나 싶었는데, 요즘은 저렇게 해주는 덕분에 난 활짝 열 수 있네 하고 편하게 살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가자면, 여기는 청결을 엄청 따지는 것 같다. 아파트 현관 앞에 아이 자전거도 통상 놔두지 않고, 야외에 놔두고, 문 밖에 무얼 잘 놓아두지 않는다. 난 그냥 한국에서처럼 아이의 자전거, 킥보드를 놔두었고, 마주 보고 있는 옆 집 아줌마는 그동안 많이 거슬렸나 보다.
오전 중, 벨이 울렸고 아파트 청소 아저씨구나 하고 무슨 일이지하고 문을 열자마자, 옆집 아줌마의 영어로 샤우팅이 이어졌다. 한국말로 해석하자면,
" 너희 애 자전거 당장 치워. 더러워서 못 봐주겠다. 지금 당장 치워."
옆집 아줌마는 조금 배우신 분이셨는지 영어를 제법 했다. 그런데 그 명령조와 우리 아들의 파란 자전거가 더럽다니 난 무슨 배짱인지 한국 아줌마의 샤우팅 공격으로 이를 받아쳤다.
"여기 내 문 앞이다. 너 정말 예의가 없구나. 터키 사람들 아이에게 모두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고 들었는데 넌 정말 별로다. 안 치울 거야. 여기 내 소유의 자리거든."
문 열자마자 영어로 공격당하고, 나도 무슨 깡인지 열자마자 영어로 같이 싸웠다. 결국 아줌마는 내가 영어를 할 줄 아는 것에 깜짝 놀랐는지, 관리실에 전화할 거라고 말하곤 문을 닫았다. 청소 아저씨와 나는 잠시 동안 단둘이 마주 보았다. 그러곤 관리실에선 전화가 안 왔다.
너무 화가 나고 서러운, 다음날 터키어 수업을 들으려 집 근처 학원 가서 터키어 선생님께 이런 이야기하니 이런 일이 종종 있었는지, 에틸레르 부자들은 차원이 다르며 자기가 가르쳤던 일본인, 태국인 주재원들에게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흔히 우리말로 '꼰대'가 여기에 많이 산다는 것이다. 터키인은 통상 아이 자전거 집 앞에 놔둔다고 뭐라고 하지 않는다며 그 사람이 별난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층간소음이 나진 않나 싶어 인사드린 아랫집 터키인 할머니는 아이는 원래 소리가 많이 난다고 편하게 지내고 건강하면 된다고 이야기 해준 좋은 분도 계셨다.
이런, 내 옆 집에 '꼰대'가 산다니, 내 나이 곧 마흔인데 이런 대우를 받다니, 동양인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들의 눈에는 난 나이를 많이 먹어봤자 29살로 보였을 것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해 주셨다. 그동안 터키어 선생님은 나를 겨우 27,28살로 봤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란, 나는 역시 늙었는지 선생님께 고맙다고 말했다. 아하하하. 터키인의 눈에는 어릴 때 덜컥 아기를 낳은 어린애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아니 우리 아들이 저만큼 큰 데, 거 참, 고맙구먼. 내 나이가 몇인데. 푸하하하.
약간의 어린애를 다루는 듯한 반말, 명령조가 늘 탑재되어 들었다는 여러 외국인 주재원의 경험담을 터키인 선생님에게 듣게 되니, 막 끌어 오르던 분노가 '아, 나만 겪는 일이 아니구나.' '여기 텃세구나.' 하고 느낀 순간, 한 편으로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
그들의 눈에는 철없는 저 애 같은 외국인에게 한 수 가르쳐줘야겠다는 생각을 준다는 내 외모, 난 벤자민 버튼처럼 참, 한 10년은 되돌아갔으니 아싸! 그래 좋게 생각하자.
이 부자동네에서, 난 텃세를 처음 겪었다. 다짜고짜 명령조와 삿대질, 아 참, 영어를 못했으면 어쩔 뻔했어. 한 마디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다가 실컷 혼만 났을 텐데, 새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드는 요즘이다. 아무리 번역기가 발달해도 여기선 난 결국, 눈 뜨고 코 베이는 외국인일 뿐이니까. 텃세도 결국 이길 한국 아줌마니까, 난 그렇게 아들의 파란 자전거 그대로 당당히 우리 집 문 앞에 놔둔, 한국 아줌마이니까. 아니 근데 남의 집 문 앞에 어린이 자전거 가지고 더럽다니 정말 돌아이 아니야?(죄송합니다 타향살이 참 힘드니 이해해주세요.) 그렇게 이렇게 열심히, 무슨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난 이스탄불에서 텃세에도 잘 살고 있다.
그러곤 외쳐본다.
'아자, 배워서 싸우자! 꼰대를 이기리라! 파이팅!'
'우리 집 파란 자전거 파이팅! 대한민국 파이팅!'
외국에 살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요즘 참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힘내자. 아니 뭘, 힘내지 말고 힘 빼고 야반즈처럼 거칠게 살아보자. 아하하하하.
덧붙임)
이 글을 처음 쓸 때만 해도 돌마바흐체에 줄을 서기 시작할 단계였는데, 이 글을 수정하는 지금은 돌마바흐체로 가는 줄이 장사진을 이룹니다.(2022년 10월 기준) 코로나 팬더믹이 끝난 튀르키예의 분위기, 공식적으로 마스크 의무화가 해제되었고 이제 예전과 마찬가지로 몇 시간씩 줄 서서 관광지로 들어갑니다. 대통령 선거 재외국민 투표를 실시한 후, 이스탄불의 살인적인 교통에 지쳐 계획 없이 간 돌마바흐체 궁전은 그 때는 제법 조용하고 한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