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마음의 문을 꽉 닫고 살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전까지도 나는 사람을 참 잘도 믿었다.
내게 세상은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점점 나이가 들수록 세상의 오미자 맛을 보며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조금씩 닫으며 살게 된 것 같다.
의심이란 게 하루아침에 생기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나에게도 이 의심이라는 단어는 참 느낌이 별로이기도 하지만, 친근하기도 하다.
'의심'은 '호기심'을 동반하기도 하고 때로 나의 애정하는 추리물들의 무한한 동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합리적 의심... 뭐 이런 거창한
단어로 포장을 해도
"저 의심 많은 사람이에요."라고 떳떳하게 말하기엔 별로 떳떳하지 않은 그런 단어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내가 뭔가 많은 것을 이루었다거나 가졌을 때 타인에 대해 의심도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무조건 적인 의심을 한다는 건 그냥 정신병이지 않을까?
의심의 뿌리는 두려움인 것 같다. 하지만,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꼭 타인에 대해 서만도 아니다.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도 의심이 많이 들었었다. 막상 그 의심을 걷어내고 한 발 내디디면 되는데
그러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들을 망설이는데 썼던 기억이 난다.
그뿐일까? 타인의 무조건적 호의 또한 이제는 의심스러운 나이다. 슬프지만.
오늘 제목처럼 중국의 인재 등용에 있어
疑人莫用 用人勿疑(의인막용 용인물의) 원칙을 잊지 않고 나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진정한 대인배가 아닐까?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대우를 받고 싶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냉철한 판단력이 필요할 것 같다. 어떤 기준을 갖고 어떤 사람을 대할 것인지 기준이 있다면
실수를 줄이지 않을까?
나이가 점점 들어가며 조급해질 때가 많다. 그것은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어서이다.
나이가 이런데, 이것밖에 못했어? 나이가 이런데 너 이것도 못해? 나이가 이런데 이런 사람이었어?
아.... 그래서 "
어떻게 이렇게 대인배세요?~~
시간이 흘러 흘러 이런 진짜 어른 소리 한번 들어보고 싶다.
이 글을 써 놓고 몇 달 되지 않아 정말 놀라운 일이 생겼다. 1년 전 갑자기 다가와 정신을 쏙 빼 놓고서는 나와 매우 오랜 인연의 어떤 분 사이에서 그렇게 시샘을 하고 난리를 친 어떤 사람. 나도 계획된 일이 아니어서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지만, 마치 그 사람때문에 쫓겨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만든 그런 일이 있었는데
한 두달 전에 전화가 왔다. 사과 아닌 사과 같은 사과 같지 않은 사과를 하는 전화를 받았는데 예전처럼 흥분이 안되고 담담했다.
상대방의 그 어줍짢고 예의없는 사과 전화 속에 '하여간대인배야'라는 소리가 나왔다.
내 귀의 캔디는 하여간을 순삭해 버리고 대인배만 입력했다. 내 주특기인 살코기만 먹은거다.
어찌나 통쾌하던지~
아! 글쓰기의 매력은 이렇게 손으로 쓰고 나서 머리로 기억했다 그 순간이 왔을 때 흥분하지 않고 잘 넘기는 지혜가 생긴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