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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Sep 27. 2021

빨간스쿠터 트라우마, 이유있는 개고집

EP11_우리 개는 빨간스쿠터를 싫어한다. 나도.

빨간스쿠터.

흔하게 볼 수 있는 배기량이 크지 않은 빨간 스쿠터.

푸코와 나는 가끔 작은 동질감을 느낀다.


산책을 할 때 푸코가 길을 가다 유일하게 진절머리 치며 뻐팅기는 때가 있다. 바로 빨간 스쿠터를 마주할 때.

이런 느낌의 스쿠터. 예쁘다!

빨간색을 구분하지 못할텐데 이상하게 빨간 스쿠터를 보면 식겁하고는 가던 길을 멈춘다. 심할 때는 뒷걸음질 치고 아예 주저 앉아버리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D사의 시티라인일 것 이다.(정말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배달용 스쿠터)


특히 40~50대의 중년 남성이 이 스쿠터를 타고 있으면 푸코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한다. 스쿠터 마후라 배기음 때문일까 하는 추측도 있었으나 그냥 서있는 스쿠터만 봐도 그러니 그 형태 자체가 녀석에게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어떤 요인이 푸코를 얼어붙게 하는지 몰라서 초창기에 산책을 할 때는 시바스러운 '고집'인가보다 하고 억지로 녀석을 안고 가거나 채근했다.


'푸코, 왜 안가는 거야. 가자, 가자.'


몇 번의 산책으로 '푸코는 빨간 스쿠터를 싫어한다, 아니 무서워한다.' 라는 결론이 나왔다. 푸코도 빨간 스쿠터를 탄 중년 남성에 대한 어떤 트라우마 같은 게 있는 걸까.

못가 안가!


나의 빨간스쿠터 트라우마는 10대 시절에 닿아있다. 중학생 시절 어느 주말, 친구들과 수행평가를 준비하기 위해 모였다. 한적한 주말의 학교는 모이기 좋은 장소였고, 학교 가는 지름길은 유독 한적했다. 2차선 도로임에도 인적이 드물었고 주말의 날씨 답게 따사로왔다. 나는 햇볕에 맞춰 걷고 있었고, 왼편에 빨간 스쿠터 한 대가 나와 맞춰 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쿠터가 사람 보폭에 속도를 맞춰 간다는 것부터 이상했지만 주말 햇살에 심취했던 나는 정말 아무 생각없이 걸었나보다. 빨간스쿠터에는 통통한 빨간 헬멧을 쓴 남자가 타고 있었고, 그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시력이 나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걸었다.(공부할 때만 안경을 쓰곤 했다.)


제기랄


빨간 스쿠터와 나는 나란히 걸어 학교로 들어갔다.

'저 사람은 왜 학교를 가지? 우리 학교 학생아닌 것 같은데?' 라는 찰나의 고민이 떠도는 순간,

멀리서 친구가 보였으며 손을 흔들었으나 이내 무색해졌다.

용감하고 씩씩했던 친구는 맞은편에서 큰 돌을 들고 달려왔다.


'저 새끼 고자 만들거야!!!!!!!' 라는 외침과.


뒤를 돌아보았다.

빨간 스쿠터를 탄 빨간 헬멧을 쓴 남자는 자신의 성기를 꺼내놓은 채 나를 따라 학교로 들어오고 있었고,(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과시했었을 것이다.) 나쁜 시력과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던 나는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그와 함께 학교를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였다.


내 인생 첫 바바리맨. 말로만 듣던 그 바바리맨. 심장이 북 치는 소리만큼이나 크게 요동쳤다. 태연한 척 어른인 척 아무렇지 않은 척을 시도해보았지만 빨간 스쿠터의 실체를 알아채린 이후 전혀 쓸모없는 노력이였다. 그나마 안경을 안 쓰고 있어서 정확히 보지 못한 걸 감사하며 속으로 욕을 곱씹었다.


'하, 시바.'

하 시바~~~~~~~~~~~

그 사건 이후 절대 주말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벽돌을 들고 뛰어와준 친구가 고마웠고(이름이 아직도 생각난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스쿠터를 탄 이가 보이면 시선을 회피하거나 혼자 골목 지나가지 않도록 했다. 나에게 해코지할 일은 없겠지만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 나타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노파심을 가득 안고 등하교를 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남자의 얼굴, 눈매, 몸집, 피부색, 그리고 빨간 헬멧과 스쿠터까지 너무 선명하게 기억한다. 덜컹 내려앉은 심장까지도.


꽤 바래졌을 법한 시간임에도 붉은 그 색은 또렷하다. 그렇게 십여년이 지난 나도 이런데, '어떤' 사건을 겪은지 5~6년 밖에 안된 푸코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돌과 함께 저새끼 고자만들겠다고 달려오는 지켜줄 동료가 없었기에 오롯이 그 모든 두려움을 혼자 감내해야했을테다. 말 못하는 착한 짐승이기에 단순한 수치심과 불쾌감 이상이였을지도. 녀석의 트라우마가 씻겨나갈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시간들을 겪고 녀석은 나에게 온 걸까.

주저 앉아 본다. 집에 가기 시러

푸코가 움찔거릴 때나, 이유없는 고집을 부릴 때 나는 다시금 녀석의 털 속 상흔을 뒤적여 본다. 인간에게 그렇게 상처 받고도 다시 인간에게 마음을 열어 주어 감사하다.

인터넷 기사에서 정신의학과에 정작 가야할 사람들은 오지 않고 그들로 인해 상처 받은 이들이 가득하다는 웃지못할 댓글을 봤었다. 나에게, 푸코에게 찢고 싶은 기록을 한 조각을 남겨 준 그들은 지금쯤 잘 살고 있겠지 어디선가 또.


산 속 보호소에서 있던 녀석은 수풀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나만 진드기를 걱정할 뿐.


가끔 뉴스에서 동물 학대하는 사람들 얘기를 본다. 차에 매달고 가거나, 때리거나. 찰나의 이기적인 유희로 인해 평생의 상처를 안고 가는 사람도, 개도 있다. 인류애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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