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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Mar 18. 2022

어떤 생명체에게 0순위가 된다는 것

반려인 팬클럽

립제이 언니 사랑해요 ㅜㅜ

얼마 전, 힙하고 멋진 댄서들이 한동안 미디어를 달궜다. 오롯이 자신의 몸짓으로 표현하고 소통하는 댄서들의 언어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화면 너머로 내게 자극이 된 장면은 그녀들이 거침없이 풍기던 '내가 짱이야.' 라는 모습.

무수한 시간 동안 좌절과 몰입을 반복하며 쌓인 자신감, 현실 속에서 ‘댄서’라는 불안정적인 직업을 택하고 유지하며 키운 자존감. 이 두 가지가 아주 적절히 섞여 불편하지 않게 멋진 무대와 에피소드를 만들어냈다.


그중 한 출연진의 인터뷰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댄서의 어머니는 '너가 짱이야. 우리 딸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며 자신에게 늘 최고의 것을 주셨다는 내용이었다. 30여 년이라는 짧지 않은 삶을 살면서 마주한 이들 중 공통적으로 저런 단단함을 가진 친구들에게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우리 엄마는 늘 내가 최고라고 해.', '여전히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라고 하셔.', '내 선택은 뭐든 믿어주셔.'라는 길지 않은 마법의 주문 같은 말들. 다소 무뚝뚝하고 때로는 굉장히 이성적이셨던 우리 부모님은 그런 주문들과는 거리가 있으신 분들이었다. 제야를 비롯해서 주로 예체능을 전공한 친구들을 보면 그들의 행보보다도 그런 정서적 밑거름 자체가 부러웠던 것 같다. 불확실함에 뛰어들 수 있도록 만든 지지와 믿음.


새로 맞이한 식구들에게서 그런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 기준과 기대 없이 그저 사랑하기에도 바쁜 그런 사랑을 경험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평가받은 날들 속에서 우리는 친구, 연인, 동료 등 다양한 관계마다 알게 모르게 저마다의 기준을 세우고 기대하며 실망하기를 무한 반복한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왜 상대는 저렇게 하지?, 쟤는 나한테 왜 그렇게 행동할까?, 우리 애한테 이렇게 해줬는데 왜 우리 애는 이거밖에 못할까?'  같은. 우리가 타인에게 실망하고 관계의 지속성을 고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쏟은 애정만큼 다시 받기를 원하고 기대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심리 지형에서 생기는 일종의 보상작용 같은 것.


무조건적 지지일까. 그냥 침대라고 느끼는 걸까.


그러나 두 털뭉치에게는 무언가를 바라며 애정을 쏟지 않았다. 혹여 바랐던 게 있다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라.’, ‘오늘 하루도 보너스니까 즐겁게 존재해라~’ 정도. 관계의 기저에 인간과 반려동물 사이의 비대칭적 시혜성이 깔려있기 때문인 건지, 나는 푸코와 두부에게는 바라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내가 그렇게 갈구하던 ‘무조건적 사랑’을 그렇게 배웠다. 따져보면 사랑을 주면서 배운 게 아니라 그 이상을 받으면서 가슴으로 알게 된 셈. 덕분에 나는 꽤 정서적 안정감을 갖고 타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작게나마 나의 곁과 시간과 공간을 내줄 수 있고, 머릿셈 하지 않는 관계에 대해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다. 어릴 적 경쟁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던 지난 시절과 이렇게 멀어져만 간다. 인간적으로 기분 좋게 말이다.


사실 우리 집 녀석들은 보통의 반려동물처럼 정겹게 다가와 달라붙는 편은 아니다. 다만 말없이 슬며시 다가와 시치미 뚝 떼는 듯한 표정으로 온기를 나누곤 휘 사라진다. 내가 어떤 옷을 입든, 무슨 직업을 갖고 있든 나의 외피와 무관하게 반려인을 아끼고 의지한다. 숨 쉬는 만큼이나 평가가 난무하고 통념과 관습에 기댄 재단이 휘몰아치는 삶에 허우적거리다, 승모근이 돌덩이가 되는지도 모른 채 귀가했어도 나에겐 털뭉치들이 있다. 거의 정적에 가까운 고요함 속에서 두 털덩이는 온몸으로 나를 위로한다. 이 날 것의 나를 '존재' 자체로 그대로 받아주고, 애정과 지지를 보내주는 녀석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어느 날 밤.


본가에서 짐 정리를 하던 중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엄마의 육아일기를 보았다. 아랫니 난 아이가 까르르 웃는다며 스쳐 지나갈 장면들을 잡아채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히 담은 커다란 수첩. 내가 푸코와 두부의 일일을 놓치고 싶어 기록하는 것처럼 나보다 어린 엄마는 나라는 생명의 시작을 써 내려가고 계셨다. 말이 아닌 글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되새기고 계셨다. 그렇게 내 엄마도 ‘처음’이었고 나도 오롯이 지금이 ‘처음’이며 완전하지 못하지만 꽤 해볼 만한 사랑을 배워간다. 이렇게 쓰고 읊조리는 무언가가 또 누군가의 ‘처음’에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난 또 다른 ‘처음’을 만나 지금보다 더 용기 내어 사랑해 보고 싶다. 그렇게 새 식구가 생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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