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부 사랑의 유한성
살고 싶은 동네를 사전 탐방할 때 길고양이 급식소를 유심히 보곤 한다. 이전에 살았던 동네도, 새로 이사 온 동네도 모두 길 위의 생명들에게 친절하다. 지금 사는 동네엔 각각의 구역마다 고양이들을 챙겨서 돌봐주시는 분들이 있어서인지 고양이들은 사람을 피하지 않고 대부분 한쪽 귀에 TNR(중성화 수술) 표식을 갖고 있다.
푸코와 여느 때처럼 산책을 하던 중 흰 고양이를 만났다. 유기가 아닌 차라리 유실이길 바라는 두부와 닮은 흰 고양이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길고양이’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하얗고 마른 길고양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꾀죄죄한 고양이의 회색 털 사이로 한 때는 집고양이였던 흔적들이 남아있다. 우리 두부의 첫인상도 저랬을까.
두부는 화실 상가 계단에서 발견됐다. 대학가 원룸이 많은 지역에서는 학기가 끝날 때쯤이면 예쁜 품종묘들이 떠돌아다니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파랗고 노란 눈을 가진 두부도 그중 하나였다. 거의 회색 털을 가진 고양이는 제야에게 구조되었다. (사실 구조라기보단 두부의 마지막 선택에 가깝다.) 꽤 늦은 시간이었고 고양이는 난생 처음이었던 그도 선뜻 회색 고양이를 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두부에게 밥을 사러 오는 동안 그대로 있으면 책임지겠다는 조건부 공략을 내세웠고, 두부는 그 계단에 한참을 앉아있었던 덕분에 결국 식구가 되었다. 사람 손을 탔던 고양이는 한동안 겁에 질려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길 위에서 어떤 생활을 한 건지 의문투성이인 녀석은 화실 창고 구석에 들어가서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 한 달은 캣타워에서 생활하려고 하지 않는 바람에 제야와 서로를 난로 삼아 두부를 패딩 속에 매일같이 안고 잤다. 그래서인지 두부는 여전히 심장 박동에 등을 대는 것을 좋아하고 겨드랑이와 가슴팍에 파묻혀 있는 걸 사랑한다. 숙면의 시간이 찾아오면 여전히 두부는 힘껏 침대 위로 뛰어올라 겨드랑이를 파고든다.
그와 주고받은 온기 덕에 회색털의 마른 고양이는 새하얀 털을 가진 뚱뚱냥이가 되었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이들은 새하얀 뚱뚱고양이를 예뻐해 주었다. 간식을 한 아름 사들고 와 불러도 대답 없는 두부 이름을 열심히 부른다. 아마 두부도 처음 주인을 만났을 때는 작고 새하얀 조그만 오드아이의 예쁜 고양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주인과 주인 친구들 모두 그 고양이의 사진을 찍겠다고 온갖 간식과 사랑과 애정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더 이상 작고 예쁜 고양이를 키울 수 없는 '피치 못할' 상황이 되었고, 버려졌다. (수소문 끝에 주인을 찾았으나, 주인은 더 이상 키울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ㅎ)
조건부 사랑과 애정의 결말은 유기였다. 길 위에서 두부는 점차 못생겨졌고 아팠다. 그때 생활 때문에 두부는 작은 소리와 움직임에도 유독 예민하다. 양쪽 눈 색이 다른 오드아이는 태생적으로 청력이 안 좋다고 하는데도 녀석은 푸코만큼이나 자극에 크게 반응한다. 처음 두부를 우리 집으로 데려올 때 침대 밑에서 나오지 않아 반나절이 걸렸었다. 어쩌면 또다시 버려지는 것 같다는 서글픈 예감이 들었던 걸까. 침대 밑 두부를 한참 설득한 끝에 두부는 볕이 따사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거실을 소리 없이 거닐며 마당의 새들을 구경할 수 있는 고양이가 되었다.
SNS에서 유기동물 센터의 소식들을 받고 있는데, 하루에도 수십 건씩 올라오는 구조 소식과 입양, 임보 이야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들이 유기 혹은 파양 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털이 빠져서, 나이가 들어서, 이사를 가야 해서, 아기가 생겨서, 가족이 싫어해서 등등. 여태껏 본 가장 최악은 ‘애교가 없어서…’ 이유는 수천가지이고 결말은 ‘버리기’로 종결된다. 조건부 사랑의 결말은 예견된 슬픔이다. 하긴 사람 식구도 버리는 세상에 말 못 하는 동물 하나 버리는 게 대수랴. 그렇게 H대 학생이 조건부 사랑을 끝내버린 덕에 두부는 나의 우주로 들어왔다. 내 인생에 고양이라니! 푸코가 예견된 사건이었다면, 두부가 내 삶에 나타난 건 정말 사고였다.
삶은 사건, 사고의 뒤범벅 속에서 고유한 파동이 생긴다. 어느 여름 초등학생 아이들이 어미가 버린 고양이 한 마리를 구조한 일이 있었다. 이미 아픈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던 나는 이를 외면했다. 고작 할 수 있었던 일은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병원을 가서 비용을 지불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보통 동물병원에서는 길 위 동물들을 잘 받아주지 않는데 딱한 사정을 들으신 마음 좋은 수의사 선생님께서 죽어가던 생명을 받아주셨다. 응급치료를 마치고 아이들은 신발 상자에 탈수 증세로 인해 300g밖에 나가지 않는 고양이를 안고 한참을 돌아다녔다. 워낙 길 위의 동물들이 많을뿐더러 한 생명을 거둔다는 것의 무게감을 알기에 대부분의 어른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아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해가 기울고 자정이 다 돼가던 무렵 아이들은 정말 운이 좋게 따뜻한 아가씨를 만났고, 운이 좋은 죽다 살아난 고양이는 멍멍이 친구와 새로운 가족을 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건부 사랑이 어린이들에게는 무색해진다. 어린이들도 아는 그 무조건, 무모한 사랑을 왜 어른이 되면 외면하게 되는 건지. 어린이들 손에 또 하나의 우주가 생을 연장하고, 식구를 만났다. 그날 아이들의 하루는 학원에 앉아있던 여느 때 보다 붉게 물들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여름 날의 사고.
나에게도 사고처럼 회색 인간에게 회색 고양이가 왔고, 두부가 점점 하얀 때깔을 뽐내는 걸 볼 때마다 흐뭇한 건 나도 내 본연의 색을 찾아가는 중이라는 증거 같아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