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잘 키우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기르는 식물들은 아파트 베란다라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잎은 항상 선명한 초록색을 띠고 있고 꽃들은 곱디고운 색으로 활짝 피어 화사함을 전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웃들이 키우다 실패해서 죽어가는 식물들은 그분의 손에 넘어오기 일쑤입니다.
어느 날도 그분에게 죽어가는 식물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잘 살려달라는 부탁과 함께 “어떻게 하면 식물들을 그렇게 잘 키울 수 있느냐”는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을 조절할 줄 알아야 잘 키울 수 있지요”하고 말입니다.
그분 말에 의하면 식물 사랑에 초보인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은 사랑이 너무 과다해서 오히려 식물들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나무나 꽃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물을 너무 많이 준다거나 영양제나 비료를 과다하게 주는 경우 오히려 식물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식물을 잘 키우려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배수가 잘 되는지 살펴주거나 햇볕을 쬘 수 있도록 창가에 놓아주고, 바람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주는 등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그분이 식물을 잘 키우는 노하우였던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한 사람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자녀들을 잘 성장하게 하려면 무엇이든 부족함이 없도록 많은 것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잘 판단하고 해결하면서 좋은 인격을 가진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맞벌이 부모나 스스로 양육환경이 다른 가정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잘 돌보지 못한다는 자책감으로 인해 돈으로 아이들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란 자녀들은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이런 경우 부모의 사랑은 자녀들에게 오히려 해가 됩니다.
부모란 항상 자녀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자녀들 걱정에 앞서 오히려 더 주고 싶어지는 부모의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을 넘치게 준다면 물이나 비료를 많이 주어서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식물처럼 내 아이도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는 그렇게 병들어갈지도 모르니까요.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새의 날개를 꺾어 너의 곁에 두려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 하나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과다한 사랑은 연인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그러한 사랑의 경계를 가늠하지 못해 헤매곤 합니다.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추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만 사랑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항상 경계에 서서 갈팡질팡 하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현재 내가 전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인지, 아니면 차고 넘치는 사랑으로 오히려 ‘독’이 되어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