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이 닥치기 전, 많은 사람이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하며 자주 묻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지구에 종말이 오고 혼자 살아남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지요. 쉽게 할 수 있는 질문이었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나이가 서른 살 정도였는데 만일 가족이나 이웃,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곳에 혼자만 살아남았다면 어떨까, 이후에도 자주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점점 확고해지는 생각은 바로 ‘살아있음’이 아니라 ‘살아있음의 의미’를 찾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많은 생명과 사물들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시작이었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좁은 우리에 갇힌 동물들이 숨을 쉬고 밥을 먹으며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있지만 그 상태를 살아있다고 볼 수 없듯 단순히 숨을 쉰다고 해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의지와 모든 관계가 차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얻을 때라야 비로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살아있음의 의미를 위해 주변과의 관계가 필요하다면 그들 역시 행복하고 건강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나와 함께 할 때 내가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살아있음의 의미도 더욱 충만해질 테니까요. 그것은 자연이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살아있기 위해, 나아가 살아있는 의미를 찾기 위해 타인이나 다른 생명들을 지키고 사랑하고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니 말입니다.
시골로 가서 농사 짓기를 선택한 한 작가는 아마도 이러한 관계성에 기인했기 때문에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인간은 함께 해야 하고 뭇 생명들과 더불어 가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작가는 농사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이겠지요.
최근 우리지역에도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조금 겁이 났지만 어색하고 불편해서 애써 거부했던 마스크도 이제는 스스로 찾아서 착용하곤 합니다. 나의 건강한 삶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건강한 삶을 지키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우리는 타인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 자연의 생명을 함께 지켜야 합니다.
근래에 일부 종교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도 그중 하나인 만큼 나의 신앙을 위해, 타인의 희생도 불사할 수 있다는 것은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 문 앞에 써 붙인 문장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은 것이 신앙입니다.”
이 말에는 종교의 근본을 찾기 위한 신념이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부디, 우리 곁에 있는 종교가 세상을 보다 이롭게 하고 따뜻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잃어가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만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본연의 모습으로 있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