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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10. 2022

294. 기록의 힘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담소를 나누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녀 셋을 낳아 키우면서 부부가 함께 살아온 세월이 40여년이 되어 가는데 불과 얼마 전까지도 아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 먹고 싶은 거봉포도를 사주지 않았다고 탓할 때마다 기를 펴지 못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살림살이였어도 아내가 임신했을 때 먹고 싶다고 했던 것은 다 사준 것 같은데 정작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니 이제와 증명할 방법도 없고 답답한 노릇이었겠지요. 임신한 아내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거봉포도 하나 못 사준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는 그분은 어느 날 오래된 가계부를 발견하면서 반전의 증거를 찾게 됩니다. 

가계부를 쓰던 그 시기가 딱 첫째를 임신했을 당시였는데 가계부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거봉포도 두 근 6000원’이라고 정확하게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아내가 먹고 싶다는 비싼 거봉포도를 그것도 두 근이나 사다 준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었고 그것을 아내에게 보여준 뒤에야 본인의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는 한바탕 웃음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그분과 나는 한참이나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일상으로 치부되는 것들이 기록으로 남겨졌을 때, 그것이 시간의 힘을 입게 되었을 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면서 말입니다. 

청북면 고잔리 고령신씨 후손으로 평생 농촌을 지키며 살아온 신권식 어르신은 벌써 아흔을 훌쩍 넘기셨지만 젊은 시절부터 매일 써온 일기가 서민들의 시대적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경기문화재단에서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책을 중심으로 서울대 박사논문도 나왔고 국가기록원에도 자료로 등재되었습니다. 평택사람들의 소소한 생활상이 국가적인 위대한 기록으로 남은 것입니다. 

일기에는 그야말로 소소한 일상이 담겨 있습니다. 1950년대에 새끼돼지를 얼마에 구입했는지, 시장에서 산 물건은 무엇이고 가격은 얼마였는지, 마을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어떠했는지, 날씨에 따라 농사는 어떻게 지었는지, 당시 전국적인 사건이었던 군사혁명이나 광주학생운동은 어떤 생각으로 바라보았는지, 정치적인 상황은 어떠했는지 등등 그날그날의 감정과 상황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어르신을 인터뷰한 것이 십여 년 전인데 아마도 그날 어르신의 일기에는 십년 전 내 모습이나 말투, 행동에 대한 이야기도 지세히 담겨있을 겁니다. 나 스스로도 기억나지 않는 십년 전의 내가 어르신의 기록 속에서 생생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왕들은 기록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았고 기록하는 이가 별도로 있어 왕의 사소한 언행은 물론이고 각종 회의에서 나오는 소소한 말까지도 모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래서 한마디 말도 신중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기록에 남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기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평택시에서 행하는 모든 회의를 기록하도록 하는 조례가 생긴다면 아마도 많은 것들이 변화하겠지요. 사람들은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하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오래된 가계부의 기록으로 40여년 억울함(?)을 풀게 된 분의 말씀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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