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오랫동안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사람들이 제각기 바다 한 가운데 외롭게 떠있는 ‘섬’ 같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여럿이 함께 어울려 있는 사람들, 그 속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외로움의 근원을 읽어내고 그것이 마치 섬 같다고 생각했던 걸 보면 시인의 눈은 정말 예사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외로움을 보고 느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외로운 존재들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고 말합니다. 나직하지만 절제된 시인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타인과 소통하고 싶은, 외로운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희망을 전하고 싶은 시인의 강한 의지를 느끼게 됩니다.
정현종 시인이 직접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외로움의 근원을 어루만지고 싶다는 의지를 전했다면 김춘수 시인은 그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바로 ‘꽃’이라는 시에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은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서로에게 “꽃”이 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서로에게 꽃이 된다는 것은 그의 곁에서 잊히지 않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고 기꺼이 그의 희망이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의 외로움을 견디며 내일의 희망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나는 위에서 말한 두 시인의 시를 읽으며 또 한 번 깨닫게 됩니다. 그저 몸짓에 불과했던 당신이 나의 부름을 받고 꽃이라는 희망으로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먼저 이름을 부르며 내가 먼저 손 내미는 것이 바로 희망을 만들어가는 일이라는 걸 확인하게 되었으니까요.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힘겨운 모습을 보고 선뜻 작은 금액을 건넬 수 있는 마음, 그것은 내가 그 어린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그 어린이들에게 꽃과 희망이 되는 일입니다. 엎드려 울고 있는 내 등에 당신의 손이 얹힐 때, 말하지 않아도 그 따뜻함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 때 당신은 나의 꽃이 되고 희망이 됩니다.
힘든 세상 속에서 나 혼자 있다는 생각에 외로워질 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려울 때, 오늘의 절망이 너무 깊어 세상 속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꾸만 움츠러들 때 우리가 다시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당신’이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은 근원적으로 외로운 존재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스며들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우리는 다시 외로움을 딛고 일어서 씩씩하게 내일의 희망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