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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9. 2022

78. 빨래

처음 빨래를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장사 나간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시작한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으니까요.     


1980년대 초만 해도 시골에서 세탁기는 구경도 하기 어려웠습니다. 탈수기능만 있던 일명 ‘짤순이’도 한참 뒤에야 볼 수 있었으니 빨래는 그저 큰 고무 통에 넣고 빨래판에서 일일이 비누칠 하고 몇 번이나 헹궈야 했지요. 특히 이불이라도 빨아야 하는 날에는 통속에 가루비누를 풀어 담가놓고 발로 질근질근 밟아서 빨았는데 지금도 발에 밟히는 미끌미끌한 그 느낌이 고스란히 기억납니다. 그런데 요즘은 세탁편의점 등에 몇 시간만 맡기면 금방 뽀송뽀송한 이불을 찾을 수 있으니 참 편리한 세상임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과학발명품 가운데 여성들을 위한 가장 큰 발명품은 세탁기라고 합니다. 오래 전부터 여성들은 빨래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18세기경 세탁기가 발명되고 난 후에는 빨래에서 해방된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으니 세탁기야 말로 여성인권을 위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아닐까요.    

 

내가 처음 본 세탁기는 세탁조와 탈수조가 따로 분리된 2조식 세탁기였습니다. 한쪽에서 빨래를 하고나면 옆 칸으로 옮겨 탈수를 하는 반자동식이었지요. 이후 전자동 세탁기가 나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세탁과 탈수가 자동으로 되는 참 신기한 세탁기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세탁조 가운데 봉이 달린 일명 ‘봉봉세탁기’도 등장했고 통이 통째로 돌아가는 ‘통돌이 세탁기’, 공기방울이 세탁을 돕는다는 ‘공기방울 세탁기’ 등 다양한 세탁기가 등장했습니다. 나중에는 빨래를 위에서 넣는 것이 아닌 앞에서 넣고 뺄 수 있는 드럼세탁기도 등장해 주부들의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집집마다 빨래를 넣고 버튼하나 누르면 세탁과 탈수와 건조까지 한꺼번에 해결하는 세탁기가 있어 빨래걱정을 하는 주부들은 별로 없겠지만 지금도 내겐 손빨래를 했던 때가 참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세탁기가 등장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손빨래를 고집했던 건 아마도 때 묻은 빨래를 손으로 비벼 빨고 맑은 물에 깨끗이 헹궈낸 뒤 툭툭 털어 빨랫줄에 널어놓을 때의 개운하고 뿌듯한 기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아기가 쓰는 하얀 천기저귀는 삶아서 두드려 빤 뒤 맑은 물에 헹궈 빨랫줄에 줄지어 널어놓으면 한 시간도 채 안 걸려 뽀송뽀송하게 마르는데 볕이 아직 좋을 때 기저귀를 걷어 차곡차곡 개다보면 손바닥에 느껴지는 볕의 온기는 어찌 그리 따뜻한지, 지금도 그 기분 좋은 느낌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    

 

빨래가 바람에 흔들리며 서서히 마르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속 모든 근심이나 걱정도 저렇게 바람에 모두 날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젖은 빨래가 말라 따뜻한 온기를 품듯 그렇게 내 삶도 언젠가 젊음의 물기가 마르고 나면 평온하고 따뜻한 온기만 남겠지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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