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고로호 Jun 03. 2021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면 - 지렁이

미물일기 #3


한 달 넘게 목과 어깨가 아팠다. 처음 증세가 나타났을 때 금방 나을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왔다. 눕고 일어나는 간단한 동작조차 한참을 버둥거려야 했다. 병원에서 주사를,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지만 통증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물건을 들고 나르기가 어려워 일 년 가까이 다니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뒀다. 즐겁게 다니던 곳이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맘 편히 몸이 회복하기를 기다리며 쉬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하필 돈이 들어갈 데가 많은 시기. 보온 물주머니로 목을 찜질하다가도 새로 산 경추 배게에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도 걱정이었다. 창작활동으로 돈을 벌겠다며 직장을 그만둔 지 3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일정한 수익이 없다니, 난 그동안 뭘 한 걸까?


시간을 허투루 보냈다는 자책과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비관이 밀려오기 직전이었다. 신체의 통증이 마음의 통증으로 넘어가려는 순간마다 생각한 것이 있다. 지렁이와 관련된 작은 사건. 비만 오면 지상으로 기어 나와 말라죽거나, 사람들의 발에 밟혀 짓눌린 지렁이를 볼 때마다 징그럽다기보다는 불쌍했다. 지렁이는 피부호흡을 하기 때문에 비가 내려 흙속의 공기가 부족해지면 숨을 쉬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여전히 비 온 뒤 땅 위에서 죽어가는 지렁이를 보면 신경이 쓰였다.


다시 땅속으로 보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납작해지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아 지렁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고 장마철이 다가오는 이맘때 특히 집중적으로 길 위의 지렁이와 만난다. 지난주에도 한 마리, 바로 이틀 전에도 한 마리를 발견했다. 주머니에 운 좋게 휴지가 있는 날은 휴지로 지렁이를 살짝 잡아서 풀밭으로 옮겼다. 하지만 일 년 365일 내내 지렁이만을 생각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 기분 좋게 산책을 나왔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설탕이 뿌려진 핫도그처럼 끈적거리는 피부에 모래를 붙이며 몸을 비틀고 있는 지렁이를 만나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행인으로부터 ‘지렁이를 손으로 잡네, 웬일이야’라는 말을 들은 경험이 있어 주위를 먼저 살폈다. 아무도 없군. 그렇다면 이제는 지렁이와의 맨손 대결만 성사시키면 된다. 매끄러운 피부가 촉촉했다. 땅 위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녀석인지 힘이 장사다. 손아귀에서 몸을 이리 뻗대고 저리 뻗댄다. 얼른 풀밭에 놓아주고는 지렁이를 잡았던 손을 소중하게 허공에 들어 올린 채로 집에 돌아와서 손을 씻었다. 맨손으로 즐기는 지렁이와의 조우가 익숙해질 무렵, 그만 어느 할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머, 지렁이를 맨손으로 만지네."

손에 지렁이를 든 상태로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내지는 않을까 긴장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 나는 여든이 넘었어도 여태껏 지렁이는 맨손으로 못 만지는데 어떻게 지렁이를 맨손으로 만져요?"

왜 지렁이 따위를 손으로 잡고 있냐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순도 백 프로의 감탄이었다.

"발에 밟힐까 봐요."

쑥스럽게 웃으며 지렁이를 풀밭에 내려놓고 나서도 할머니는 나를 따라왔다.

"진짜 대단하네. 징그럽지 않아요? 어쩜 그렇게 지렁이를 잘 만져. 정말 대단하네."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질 때까지 할머니와 나는 같이 걸었다.그동안 몸이 좋지 않아 오랜만에 산책을 나왔는데 이런 광경을 보게 돼서 놀랍다는 말을 다시 한번 남기고 할머니는 걷기 편하게 포장된 길로 떠났다. 지렁이를 맨손으로 잡는 일이 누구에게는 대단하게 보일 수도 있구나. 사실 대단하기로 치자면 나는 지렁이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죽어가는 지렁이를 안타깝게만 여겼지 지렁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자웅동체, 눈과 코는 없고 입만 있으며,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흙속의 보물 지렁이>라는 책에 따르면 지렁이는 피부가 약하고 수분의 증발을 효과적으로 조절하지 못하므로 빛이 없는 밤에만 땅 속 굴 밖으로 나오며, 덥고 건조한 날씨일 때는 땅 속 깊이 들어가 있는다고 한다. 지표면의 낙엽, 썩은 뿌리 등의 유기물을 굴을 통하여 흙 속의 서식지로 가져가 섭취한다. 지표면에서 땅속으로 지렁이가 먹이를 운반하고 배설하는 과정에서 토양과 유기물을 뒤섞어 땅을 경운하고, 분변토로 불리는 지렁이 똥은 농작물 재배에 도움이 된다. 지렁이는 실로 지구에 없어서는 안 될 동물이다. 대단해.




내게 순수한 경탄을 표해준 할머니도 대단했다. 인간으로 80세가 넘어서까지 생존했고, 비록 잠시 몸이 안 좋았지만 회복해 홀로 건강하게 산책을 할 수 있으며, 그 연세에도 꾸밈없이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호기심을 전하는 점이 대단했다.


퇴직할 때 세웠던 자립 작가의 꿈을 아직도 이루지 못한 데다 자주 아프기까지 한 나지만 맨손으로 지렁이를 만질 수 있지 않은가? 영원히 아플 것 같고, 영원히 돈을 벌지 못할 것 같고, 영원히 발전이 없을 것 같을 때면 시무룩해도, 힘들고 무력한 시간은 언젠가 지나갈 것임을 기억하고 있지 않는가? 속도는 느리고 자주 멈출지라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내고 싶다는 의지를 지켜내고 있으니 나 자신에게도 말해주자. "대단해!"


대단한 우리들을 생각했다. 덕분에 한 달이 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돈 걱정을 하면서도 완전하게 좌절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목의 통증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아직 자주 누워 쉬워야 하지만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다. 땅속에서 제 할 일을 해내는 지렁이처럼, 나도 다시 시작해볼까? 꿈틀꿈틀.













이전 03화 새를 봅니다 -일상틈'새'관찰자의기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