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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Apr 17. 2021

연민과 혐오를 오가며 - 매미나방

미물일기 #1

겨울의 찬기가 살짝 남아있던 3월 초, 봄의 전령이 우리 집에 나타났다. 전령들은 이미 오래전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중문이 있어 집안의 불빛이 온전히 닿지 않는 현관은 어두침침했고, 게으른 인간이 쌓아놓은 택배 상자가 켜켜이 쌓여있는 곳이다. 집안을 드나들 때와 하루에 한두 번 고양이 캔을 찾으러 현관 수납장을 여닫을 때만 빼면 고요한 어둠만이 깔려있다. 몸집 작고 비밀스러운 것들이 소리 없이 드나들다 은신하기 좋은 장소였다.


언제나처럼 고양이 캔을 찾기 위해 중문을 열었다. 현관 등이 노르스름하게 켜진 순간, 까만 먼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먼지는 공중에 나풀거렸고 별생각 없이 거미줄에 먼지가 걸린 건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먼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벌레였다. 현관 벽 가운데 걸려있는 액자를 중심으로 몇십 개의 작고 까만 애벌레가 붙어있었다. 


지난겨울, 택배 상자 위에서 나방을 발견한 일이 떠올랐다. 나뭇잎이 떨어져 있기에 봤더니 배를 내놓고 죽어있는 하얀 나방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바싹 말라있었다. 매미나방이었다. 2020년 대창궐해서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을 핫하게 달구었던 그 나방. 유튜브를 볼 때마다 털이 송송난 애벌레들이 몸을 꿈틀댔고, 나무줄기를 빽빽하게 덮고 있는 나방들이 화면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수가 너무 많아 약으로 방제를 하기에는 역부족이기도 하고, 약을 치면 다른 생명체에게도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기에 공무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장갑을 끼고 나방을 쓸어내렸다. 나방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성충과 애벌레의 몸에 난 털이 사람에게 알레르기와 가려움증을 일으키며, 애벌레는 활엽수의 이파리를 모조리 먹어치운다고 한다. 매미나방 때문에 알레르기로 병원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거나 과수농가에서 매미나방 유충으로 손실을 봤다는 뉴스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매미나방은 적정수가 유지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기상이변 등의 변수로 크게 창궐하게 되면 피해를 유발하는 돌발해충. 알집에서 겨울을 난 알이 봄에 유충으로 부화하는데 따듯한 겨울로 인해 유충의 생존율이 높아지면서 이 난리가 난 것이다. 난리통에서 나방 하나가 몰래 빠져나와 우리 집 현관으로 날아들었다. 몇 달 뒤 봄소식을 전해줄 알집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나는 나방의 조용한 죽음에 감동받아 시를 썼다.


"기척도 없이 태어나 조용히 나뭇잎을 갉아먹고 소리 없이 나방이 되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낯선 집 현관에 들어와 고요히 잠들었다. 
바싹 마른 나뭇잎처럼 누워있는 나방을 보니
나 여기 있다고 소리를 질러가며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가 부끄러워진다.
조용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살다 아무도 모르게 얌전히 죽어야지."








그리고 3월, 소름 돋는 반전으로 나방은 내게 봄을 알렸다. 집 밖에서는 해충으로 분류되어 나뭇잎처럼 바스러져 사라져 가는 나방에 대해 불쌍한 마음을 가질 수는 있지만 집안에서는 달랐다. 이 집은 사람 둘과 고양이 네 마리의 영역이다. 가끔 영역을 공유하는 소수의 벌레들이 있지만 매미나방의 살아있는 유충은 그 리스트에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화면 속에서 봤던 해충방제에 나선 그 누구보다 혈안이 됐다. 현관 자동 등이 자꾸 꺼지는 바람에  중간중간 천장을 향해 손을 흔들어 가며 작디작은 애벌레들을 꾹꾹 눌러 죽였다. 잔혹하고 꼼꼼했다. 눈에 보이는 애벌레를 다 처리하고 액자를 뒤집었다. 액자 뒷면, 어미 나방이 보드라운 배털을 뽑아 만든 알집 속에서 까만 벌레들이 느리게 기어 나오고 있었다. 휴지를 두껍게 말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알집을 걷어냈다. 애벌레가 잔뜩 붙어있는 물티슈와 알집을 아직 다 차지 않는 쓰레기봉투에 넣은 다음 지체 없이 내다 버렸다. 


현관에 서서 다시 깨끗해진 벽을 바라보니 피로가 밀려왔다. 열정을 다한 해충퇴치 작업 탓만은 아니었다. 손바닥 뒤집듯이 매미나방을 시의 주인공에서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변경해버린 내 두 얼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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