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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May 10. 2021

새를 봅니다 -일상틈'새'관찰자의기쁨

미물일기#2

산책을 하다 높다란 나무들이 줄지은 길에 멈춰 섰다. 밀화부리 떼가 나무 사이를 재빠르게 오가며 울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먼 우주로 빨려 올라갈 것 같은 아름다운 소리. 아파트 단지 옆 호수 산책로 입구에서 들리는 노래의 주인공이 밀화부리란 걸 안 건 고작 일 년 전이다. 밀화부리 수컷은 까만 머리에 커다랗고 노란 부리를 가지고 있어 멀리서도 눈에 띈다.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새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종류는 참새, 비둘기, 까치, 박새, 직박구리, 왜가리, 까마귀 정도가 전부였다. 몇 년 전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를 오면서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호숫가 덤불에서 새떼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참새인 줄 알았는데 참새보다 더 작고 움직임이 분주하고 울음소리가 시끄러웠다. 참새 인척 움직이는 무리가 뱁새라고 불리는 붉은머리오목눈이라는 걸 알고는 지구상에서 가장 신기한 동물을 본 것같이 놀랐다. 갈색과 분홍빛이 도는 동그란 몸에 까만 두 눈이 빛나는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느꼈다. 내가 일곱 살로 돌아간 것 같이 천진한 아이의 표정으로 환호하고 있다는 것을. 이름을 알게 된 후 뱁새는 기회가 날 때마다 자신의 존재를 친절하게 드러내 주었다. 눈에 익으니 호수 주위에만 서식하는 줄 알았던 뱁새가 버스를 타러 가는 길목 화단에서도, 베란다 너머 나무에서도 보였다.


호숫가 소나무에서 청딱따구리를 봤을 때는 천연기념물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핸드폰 카메라를 연신 눌러댔다. 연둣빛이 영롱한 큰 새였다. 어디 먼산에서 날아온 걸까 싶었는데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텃새라고 했다. 뱁새처럼 청딱따구리도 그 존재를 알고 나니 아파트 바로 옆에서 암수 한쌍이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옆에 있었다. 뱁새와 청딱따구리가 지척에 있다고 해서 내가 인적이 드문 숲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 광고처럼 설명해보자면 대중교통으로 강남까지 50분이면 접근 가능한 경기도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다만 근처에 그린벨트로 묶인 경작지와 작은 호수와 산이 있어서 그런지 확실히 서울에 살 때보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린다.


어쩌면 환경적인 요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공식적으로 무직이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귀엽고 아름다운 세상이 곁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니 호기심이 생겼다.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게 만든 건 바로 한량의 특권인 시간적 여유였다. 많은 새들이 부끄럼쟁이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를 가로지르는 찰나의 기척, 아무리 목을 빼고 위를 쳐다봐도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노랫소리로 비밀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뿐이다. 시간에 쫓겨 바쁘게 걷는 사람들은 작은 실마리를 지나친다. 항상 급하게 어딘가에 도착해야 했을 때 내 눈에 보이지 않던 세계가 시간을 들여 천천히 걷고 자주 멈춰 서니 그 모습을 수줍게 드러냈다.







자연스럽게 관심이 뻗어나갔다. 조류 도감을 구입하고 유튜브에서 새에 관한 영상을 찾아봤다. 처음 보는 새를 발견하는 날에는 핸드폰의 줌을 가득 당겼다. 사진으로 간신히 새의 실루엣을 담아 인터넷 속의 사진과 대조하고 새의 희미한 인상착의를 기억해 이름을 찾았다. 자주 보긴 했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딱새와 곤줄박이, 해오라기와 흰뺨검둥오리 같은 새들의 이름을 확실히 외웠다. 작년에는 호숫가를 산책하고 나서 꼭 일기를 썼다. 기록을 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더 많은 새들이 보였다. 쇠딱따구리, 밀화부리, 콩새, 때까치, 오목눈이, 쇠백로, 쇠오리, 되새, 개개비, 꾀꼬리를 만났다.


이제는 길을 걷다가 누가  저 새가 뭐냐고 물어봐도 제법 잘난 척을 하면서 새 이름을 알려줄 수 있는데(물론 동네에서 만나는 새 한정)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아쉽다. 가끔은 욕심이 난다. 나보다 더 새를 잘 아는 사람들과 같이 더 다양하고 진귀한 새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 맨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새를 보기 위해 쌍안경이나 고배율 줌 카메라가 사고 싶다.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서 탐조인으로 거듭나고 싶은 욕심이 일어난 뒤에는 생각한다. 게으르기도 하고 탐조인이 되기 위해 쏟아야 하는 열정과 돈과 노력이 부담스러운 탓일 수도 있지만, 새를 만나는 일이 순수한 기쁨의 영역으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전문 탐조인들이 많은 수고와 정성을 들여 찍어주는 고퀄리티의 사진과 영상을 고맙게 감상하며 영원히 일상틈’새’관찰자로 남아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산책하는 김에 설렁설렁 새를 보는 지금이 좋다. 자세히 보지 못하면 어때. 선명하게 사진을 찍지 못하면 어때. 운이 좋으면 풀숲 사이에서 빼꼼하고 고개를 내미는 뱁새와의 눈 맞춤 정도로 만족하며 새들과의 거리를 아주 철저하게 유지하는 생활. 한여름 꾀꼬리의 황홀한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이 지금 나와 같은 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간간히 확인하고는 행복해하고 싶다.


얼마 전에 새로운 새를 목격했다. 할미새 같아 보였는데 도감에 기재되어 있는 할미새의 몸길이보다는 작았다. 같은 동네, 같은 호수, 같은 계절을 공유하는 새로운 친구가 궁금하지만 당장 해결할 방법은 없다. 다시 그 새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영원히 새의 이름을 알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궁금해서 머리가 간질거려도 어쩔 수 없지 하고 다시 산책을 이어나가는 나는 오늘도 일상틈’새’관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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