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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Aug 23. 2021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 민달팽이

미물일기 #5

집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다는 남편과의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급하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초록이 다른 데로 옮기고 가스 불 켠 거 맞지? 설마 그냥 놔두고 라면 끓이고 있는 건 아니지?"

다급하게 질문을 던지는 내게 그는 누가 들으면 큰일이라도 난 줄 알겠다며 라면을 끓이기 전에 화기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초록이를 옮겨놨다고 대답했다.


초여름, 상추를 수돗물로 박박 씻고 있는데 뭔가 물컹하고 작은 덩어리가 손에 딸려 나왔다. 작은 민달팽이였다. 냉장고에 하루 이상 있었고 물에 담긴 채로 마구 흔들렸기에 당연히 죽었겠지 했는데 빼꼼 눈이 달린 더듬이 나왔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망설이다 혹시 몰라서 핸드폰을 들었다.


상추를, 얼갈이배추를, 시금치 혹은 양상추를 씻다가 마음의 준비도 없이 민달팽이와 만난 사연들이 검색됐다. 불쌍한 마음에 우연히 발견한 민달팽이를 키우고 있다는 한 줄이 눈에 띄었다.






언젠가부터 불쌍하다는 단어를 함부로 쓰기가 어려워졌다. 타인에 대해 불쌍하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는 오만으로 여겨질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연민은 볼썽사납다. 왜 나를 불쌍히 여기냐고 뭐라 항의할 능력이 없는 미물이 대상일지라도 한 생명체로써의 나름의 삶을 무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불쌍한 마음을 자주 가질수록 피곤함이 느껴지니 불쌍함이 과도한 감정이입으로 생기는 쓸모없는 정서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작고 흐물거리는 몸으로 상추를 오물오물 먹다가 갑자기 비닐에 포장된 채 시작된 민달팽이의 여정을 상상해본다면. 깜깜한 상자에 갇혀 냉기에 몸을 떨다가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추락하기라도 하듯 엄청난 수압에 정신을 잃을뻔한 후 맞이하는 끝이 변기물과 함께 하수구로  쓸려 내려가거나 휴지에 압사당하거나 소금에 절여지는 것이라니.(소금을 뿌리면 삼투압 현상으로 민달팽이 몸의 수분이 밖으로 빠져 탈수 증상으로 죽는다고 한다) 이럴 때 드는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딱 하나다. '불쌍해!'











며칠 상추를 먹이며 방생할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만능 인터넷에는 민달팽이 키우는 법도 상세하게 나와있다. 작은 유리그릇 하나에 무농약 상추를 한 장 깔았다. 민달팽이는 매운 종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야채를 먹을 수 있다고. 수분이 중요해서 공간을 촉촉하게 유지해줘야 한다. 사육장을 뚜껑 없이 놔뒀다가 밤사이에 민달팽이가 사라진 가출 사건도 여러 건. 통풍은 원활하면서도 탈출을 방지할 수 있게 싱크대 배수구 거름망을 이용했다.


인터넷에서 본 여러 민달팽이에게는 다들 귀여운 이름이 있었다. 나도 따라 해 본다. 민달팽이니까 성은 민이요, 초록마을에서 왔으니까 이름은 초록이.(민달팽이가 나와서 초록마을 무농약 상추에 대한 나의 신뢰는 오히려 더 굳건해졌다) 제주도에서 사람 손가락만 한 민달팽이를 본 적이 있는데 그에 비하면 초록이는 몸길이가 1센티가 될까 말까 한 아기.


빛이 들지 않은 가스레인지 옆 구석 공간에 유리그릇을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고양이 밥을 주고 나면 바로 유리그릇을 조심스레 들어 민초록이의 안부를 살폈다. 민달팽이는 야행성이라더니 밤사이 상추에 동글동글 구멍이 여러 개 생겼다. 상추를 먹고 싼 초록색 똥도 군데군데 붙어있다. 냉장고에서 신선한 무농약 상추 하나를 꺼내 물에 씻는다. 초록이를 세심한 손길로 새로운 상추로 이동시킨다. 유리그릇을 깨끗하게 닦고 습도 유지를 위해 물기를 남긴다. 새 상추 위에 올라간 초록이는 몸을 길게 늘이고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내 손이 닿으면 놀란 듯 더듬이를 쏙 하고 집어넣기도 하지만 이내 용기를 내서 주위를 살핀다.






하루에 한 번 상추 한 장을 갈아주는 아주 작은 수고만으로 민달팽이는 돌봄의 기쁨을 선사한다. 매일 상추에 나는 구멍의 개수와 초록색 똥이 늘어가고 몸길이도 점차 길어지는 느낌이다. 손가락 위에서도 씩씩하게 고개를 내민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남편에게 '우리 초록이 좀 봐주세요. 너무 귀엽죠?'라며 손가락을 들이밀면 질색을 하면서 당장 밖에 놔주라고 난리. 친구에게 민달팽이를 키운다고 말했더니 역시 남편과 같은 반응이다. 식물과 동물에 정통한 학원 선생님께도 민달팽이를 자랑했더니 식물에 해를 끼치는 존재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정이라고 주위의 반응 따위는 상관없이 나는 그 작은 것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맛있게 상추쌈을 먹을 준비를 하던 내게 민달팽이는 식욕을 떨어트리는 불청객이었는데 어느덧 가스불에 말라죽을까 봐 걱정이 되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내가 먹인 녀석이고, 내가 이름을 지어준 생명이었다.


원래 계획한 며칠을 훨씬 넘겨 3주를 민초록이와 보내고 남편의 성화에 이별의 날을 잡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을 골라 미리 봐 둔 드넓은 풀밭에 초록이를 놓았다. 이제 매일 상추를 준비할 일도 밤마다 상추가 마를까 유리그릇에 물을 뿌리거나, 민달팽이의 생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이 거추장스러운 감정이 만들어낸 짧은 추억만이 남았다. 빈 유리그릇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 길, 몇 번이고 풀밭을 뒤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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