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한옥카페 안에 낯선 여자 넷의 수다가 옹알이 같다. 마알간 햇살이 창가에 부딪히는 간절기 오후. 테이블 위의 프리지어 꽃 향기가 제법 은은한데 때맞춰 '봄의 소리 왈츠'가 잔잔히 흐른다. 문득 동유럽여행 중 부슬비가 내리던 날 체스니 다리를 건너던 생각에 뭉클 콧잔등이 아파오고 붉어지는 눈시울에 벗어둔 마스크를 걸친다. 불쑥 일상 속 깊이 침범한 불청객 우한 폐렴 이슈에 지난 1년여의 시간을 혼돈으로 허둥대며 시간을 허비하다 이제야 나의 시간을 마주 보는 것 같다.
일상이 되어버린 마스크는 편리함도 있다. 화장할 줄 모르는 나는 기껏해야 한 가지로 기초화장을 끝내고 비비크림 바르는 정도가 다지만, 화장하느라 소요되는 시간은 물론 화장품 값이 절약이 된다니 한쪽이 웃으면 한쪽은 울게 마련인가 보다. 가끔 보여주고 싶지 않은 표정을 감출 수 있어 좋고 누구나 다 쓰니 튈일도 없거니와 혹자는 성형하기 좋은 시절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주변 지인들의 때아닌 성형바람이 불고 있다.
개개인의 사상과 이념이 뚜렷이 반추되는 시절이기도 하고 선과 악이 극명하게 대립하는 중에 로켓포처럼 빠른 세상의 변화로 삶의 형태가 극 반전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국민의 혈세로 운영하면서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로 형평성을 잃은 공영언론을 끊고 유튜브와 더 가까워진 사람들도 많아졌다. 신뢰할만한 뉴스들은 되레 수십만 팔로워로 위상을 더해가는 발 빠른 유튜버들을 통해 듣는 경우가 많다.
벼락부자와 벼락 거지가 극명하게 도드라지는 시대라고도 한다. 남들 주식에 미쳐 있을 때 나는 뭐했나 자괴감마저 드는 요즘이지만 주린이로 입문해 열심히 공부도 하는 중이다. 세계에서 금융 문맹률 최하위라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비대면 시대로 접어들면서 유튜브를 접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옳고 그른 정보를 필터링하며 스스로 금융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시절 되레 나는 아날로그 정서를 찾아 헤맨다. 느림, 여유, 휴식, 서정적, 풍경, 정. 어쩌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움으로 비칠지도 모르지만 변화의 급류를 타되 그 이면의 인간의 본성을 잃고 싶지 않음이다.
집합 금지로 대부분의 동호회 활동도 접게 되니 앞으로 살아갈 수십 년의 시간을 스스로 디자인하며 늙어서도 할 수 있는 일과 즐거움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도 신체도 탄탄한 근력을 만들어 둬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도 작용한다.
열정적으로 일하고 여행하다 죽으리라 꿈꾸었던 시간이 불과 1년여 만에 궤도수정을 해야만 하는 현실이 제일 가슴 아프고 여전히 그러하지만비단 나만의 아픔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이는 나 자신인데.
여전히 프라하 거리의 악사들과 벨베데레 궁전에 전시된 클림트의 '키스'와 에곤 쉴레의 혼이 숨 쉬는 거리, 마라케시에서 사하라를 향해 달려가던 모로코의 시간이 너무나 그리워 죽을 지경이지만 그렇다고 행복을 정지시켜둘 수는 없는 일.
오늘도 나는 울동네 뒷산인 관악산을 오른다. 지난주보다 더 가까이 다가온 봄기운이 청한 악수를 부여잡을 날은 곧 일게다.
햇살이 내리쬐는 바위에 걸터앉아 글을 쓰는 지금은 행복하다. 따끈한 아메리카노와 블루투스를 통해 들리는 클래식 음악, 그리고 천혜향 한 개. 누구도 부럽지 않은 지금지난주 원주 여행길에 발견한 한옥카페 사진을 들여다보며 마음의 온기도 채우고 다음 여행지를 검색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