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징그런 인간. 사람 떠난 슬픔에 젖을 사이도 없었어. 구석구석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리 많은지 앨범에 돌멩이에 기념 메달에 옷은 또 어찌나 많은지 취미생활 별로 옷이 다 다른 거야.
라이딩복, 등산복, 꽹과리복(사물놀이 의상), 골프복, 테니스복, 춤도 추러 다녔는지 너펄너펄한 옷도 한 보따리. 그거 치우느라 몇 달이 걸렸는지 몰라. 사진은 뭐하러 현상을 해가지고 버리기도 미안하고, 안 버리자니 거추장스럽고, 몇 박스나 되는 걸 태우면서 맘도 좋지가 않더라.나중에 자식들 생각해서 하나하나 정리하고 최대한 단출하게들 지내. 미니멀리즘인가 요즘 유행하는 거 그거 있잖아."
돌아가신 남편이 남기고 간 유품 정리를 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더라는 지인의 말은 그랬다. 남편을 보내는 것보다 사후 정리가 더 어려웠다고. 경제적으로 여유롭기도 했지만 돈 쓰는 게 취미처럼 보였던 지인은 드레스룸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여기저기 던져두었던 옷과 가방 신발을 바라보니 한심하더란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등지게 되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자신의 물건에 치일 자식들 얼굴이 떠올라 쌓아 두었던 옷가지와 신발 명품백 등을 나눔 하고 계절별로 필요한 몇 가지만 단출하게 남겨두었단다. 그리고 템플스테이를 통하여 한 박자 쉬고 생각해보니 사람은 無에서 왔기 때문에 떠날 때도 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시집살이 흔ㆍ적ㆍ지ㆍ우ㆍ기
우린 가끔 지워지지 않는 흔적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애써 지우지 않아도 시간이 해결해 주기도 하지만 때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선명해지는 상처는 마음과 행동을 갉아먹기도 한다.여행 모임을 통하여 알게 된 지인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지적이며 다방면으로 능력자였다. 아니 존재감부터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단지 문득문득 스치는 미소 속 우울한 표정의 정체가 모두에게 의문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돌싱녀에 지독한 우울증 환자였음을 알게 되었고, 겉과 속의 온도 차이가 극심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알게 되었다.
나도 가끔 그렇다. 독하게 산을 오르고 라이딩을 하는 이유도 어쩌면 지워지지 않는 무언가의 압박을 덜어내려는 의지 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 스스로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멘탈이 강하고 매우 긍정적이란 평을 많이 듣는 편이다. 삶의 구간에서 원치 않는 사건과 마주쳐야 할 때도 피하기보단 덤덤하게 바라보는 편이다.
처음부터 그랬을까. 노노! 병약했던 나는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께 심지어 친척들과직장상사들에게 폭풍 사랑만을 받던 순해 터지던 숙맥 같은 아이였는데, 결혼 후 고추 당초보다 매운 시집살이를 마주하면서 생긴 내공일 수도 있다.
'나는 귀하고 아까운 사람이야.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독한 시집살이에 밤마다 눈물이 베갯잇을 적셔도 그 흔한 투정을 누구에게도 한번 못하고 혼자서 모질게 견디다 생각의 전환을 통하여 만들어진 어쩌면 제2의 성격일 수도 있다.
시어머님은 무슨 연유인지 늘 내가 맘에 들지 않았고,만삭인 며느리한테 이유도 없는 화풀이를 하셨다. 옥상에 널어둔 고추를 뒤집으라던가, 새벽에 지하보일러실 연탄을 갈라던가(일부러 새벽에 불꽃이 사그라들게 조정해 놓으셨다. 덕분에 연탄불 갈기 위해 임신한 몸임에도 허구한 날 잠을 설쳐야 했고 겁이 많아 누군가 뒷채를 당기는 것 같은 공포심을 견뎌야 했다. 남편에게 한번 부탁했다가 출근해야 하는 사람 괴롭힌다며 노발대발하시는 통에 두 번 다시 말도 꺼내보지 못했다) 마당에 널어둔 고추를 다 엎어놓고 주우라는 콩쥐팥쥐에도 안 나오는 동화를 연출하시곤 했다.
훗날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착한 며느리한테 그러시면 벌 받는다는 경고? 충고? 를 몇 번을 들으신 후 시집살이를 멈추었지만 멈추기 이전에 나는 이미 마인드 컨트롤로 나를 다스리고 있었다.
시집살이를 시키신 이유란 게 그거였다.
"얘! 사람이 빈틈이 좀 있어야지. 어떻게 수십 년 살림을 한 나보다 더 살림을 잘하냐. 진짜 너 너무 얄밉더라."
나도 여자지만 여자 마음을 진짜 모르겠다.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 듣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던 나는 얄미운 며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게다,
무심ㆍ무관심
언제부터인가 나는 시어머님의 매운 말씀을 흘려듣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아이들과 무너지지 않고 살기 위한 체득이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한 끝에 시어머님의 천둥벼락이 시작되면 속으로
'왜 저러시나. 목도 안 아프신가. 네네 잘나셨어요 어머님.'
진짜 안쓰러운 마음까지 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가끔 작은 시누이의 삿대질(손가락에 불이 붙은 모양이다. 작은 시누이 손가락은 삿대질 용이다^^)에 속이 끓어오르지만 그것도 이젠 끝났다. 콩쥐로만 살아남고 싶었지만 팥쥐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콩쥐도 무서운 면을 보여줘야 한다는 진리를 시집살이 20년이 훨씬 넘어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심술이 덕지덕지한 막내 시누이는 명절 때도 시댁에 안 가고, 출가한 아들딸 손주까지 죄다 끌고 친정으로 와서 온갖 잔소리를 퍼붓는데 한 번은 그랬다.
"아이고 시집들은 잘 와 가지고. 어디서 내 동생 같은 남자를 지들이 만나."
전을 부치려고 반죽해준 그릇을 발로 툭툭 차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시누이에게 20여 년 참은 화를 쏟아냈다.
"시집을 잘 왔는지 장가를 잘 들었는지 형님이 살아보셨어요? 나도 십 년 후면 며느리 볼 나이 될 테고 이젠 더는 안 참습니다. 아니 못 참습니다. 어따대고 감히 우리 부모님이 귀하게 키워 보낸 자식한테 함부로 하십니까. 나도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내 아이 보는 앞에서 이유 없이 멸시하면 열 배, 백배로 갚아줄 겁니다. 손위고아래고 간에 두 번 다시 부침 그릇 발로 차면 발모가지를 분질러 버릴 겁니다."
나는 떨렸고 나보다 더 순해 터진 동서는 겁에 질렸다. 나 스스로 놀랐지만아..... 이렇게 속이 시원한걸 여태 참은 건가.그 후로 작은 시누이는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흔적ㆍ우울감
아픈 기억이나 고통을 속으로 참아서 생긴 흔적은 우울감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던 좋지 않은 기억은 흔적으로 남기 전에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무심해지는 습관도 나는 경험상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무심하다 못해 무관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생각이 간편해진 만큼 삶의 무게도 가벼워짐을 느낀다.
흔적 기억하기
반면
흔적으로 남겨두고 싶은 잔잔하고 뭉클한 순간도 있다. 이기심과 아집으로 인간관계를 계산기로 두드리는 사람도 있지만, 앞뒤 잴 거 없이 순수하게 마음의 깊이를 행하는 사람도 있다.
문득 목젖을 타고 넘어가 생리현상으로 사라지는 커피의 흔적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졌다. 뇌와 마음, 시간과 생각의 공간을 사색으로 물들여 준 커피, 세상은 따뜻하고 솜이불 같은 존재임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는 스승 같은 존재, 내겐 그랬다. 내가 필요할 때 투명인간이 되는 사람이 있고, 생각지도 않은 구원투수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이 인생이고 진리다.
나는 커피 대신 스벅 텀블러로 흔적을 곧추세운다.
나에게만 해당되는영속적 기억이고 흔적이다.나는 나 자신을 중심으로 기억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에게라도 남겨둔흔적이 혹여 있다면 그것은 잔잔한 미소이길 욕심 내 본다.
시집살이가 끝나고 시어머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내게 무척 잘해 주셨다. 올가미 같았던 흔적도 어느새 대부분 잊혀졌고, 시집살이 이야기를 동화처럼 구현해 낸다. 스타벅스 쿠폰 이야기를 쓰려고 시작한 글이 쓸데없이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