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짱해진 허벅지와 곧게 펴진 기립근. 땅을 딛고 선 두 다리에 불끈 힘이 들어가며, 마치 뇌에 물파스를 바른 것처럼 정신은 맑고 까닭 없이 청량하다. 걷는다는 것! 그것은 곧 몸과 마음의 정진이다.
오색의 새벽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유영하는 랜턴 불빛은 유령 같다. 오색약수의 새벽 3시는 차가웠고흩뿌리는 세우(細雨)는불안했다. 하나, 둘 계단을 오르는 산객들의 이마에 붙은 불빛은 각기 다른 룩스로 곡선 내지는 직선을 그리며 밤하늘을 향해 상승한다. 스스로 오만방자하다 생각했다. 산객들의 자부심이기도 한 공룡능선을 오르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근 한 달을 숨쉬기 운동만 하다 왔으니 초입부터 후회와 반성으로 시작한다.
산행한 지 어언 20년이 되어가건만 여전히 나는 프로가 못 된다. 초반에 급한 마음을 붙잡지 못하고 달리다, 후반부에 탈진하는 경우가 왕왕 있으니 말이다. 새벽 산행은 조망을 볼 수 없어 아쉬운 대신 고도에 대한 감각이 둔해져 좀 더 수월하고 빠르게 오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길막하는 산객들이 점점 많아진다. 한쪽으로 걸으며 추월하는 산우를 위해 배려해줘야 할 길까지 온몸으로 차지하고 걷는 사람들, 길고 고된 산행이기에 초반에 늘어지면 체력소모가 많을 것 같아 양해를 구하며 치고 나가기 시작한다.
"별!(산우가 지어준 애칭) 장뇌삼이라도 몰래 먹었나 오늘 왜 이리 잘 달려. "
행여 일행에게 민폐가 될까 숨을 고르며 대청봉을 향해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른다. 오직 랜턴 불빛에 의지해 거친 돌 사이를 비비적거리며 걷기가 여간 난망한 게 아니다. 게다가 5km를 거의 수직으로 오르니 지겨워 미칠 것만 같다. 힘들면 쉬었다 가라는 일행들을 되레 채근한다. 나 자신에게 붙잡히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흩뿌리던 비가 그치고 미명을 틈타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새 한 마리가 공중으로 솟구친다. 대청봉까지 남은 거리가 500미터인데 5km는 되는 것 같다. 갑자기 살벌한 바람소리와 함께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 윈드재킷을 걸치고 방한장갑으로 갈아 낀다.
새벽 6시쯤 대청봉에 도착했고, 강풍과 함께 매서운 한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 아주 잠깐 장갑을 벗었는데 금시 손이 곱아오며 얼굴 근육까지 얼어버렸다. 강풍에 밀려 절벽 가까이에 엎어졌다 누군가의 두 손이 이승에 안착시킨다.
세상에 대한 염원
하늘 가장자리 끝을 붉게 물들이며 새벽은 장엄하게 일어선다. 경건한 마음이 들었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 애국가를 부르고 싶어졌다. 앞뒤 분간이 안 되는 사악해지는 세상이 참으로 통탄스러운 시절이다.
십여 년 전부터 뉴스를 아예 끊어버리고 믿을만한 매체로 세상을 접했는데 요즘엔 더더욱 언론을 멀리한다. 화이자 1차 접종 후 뇌출혈로 바로 사망했다는 지인의 23살 조카의 소식에 주변은 충격과 암울함에 빠졌다.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 속이다.
초콜릿 한 개로 탄수화물을 보충하고 길을 서두른다.어둠 속에서도 마가목 붉은 열매는 유독 탐스럽고 아름답다. 중청대피소를 지나 길고 험한 업다운을 반복하며 희운각을 지난다. 갑자기 변한 계절을 읽지 못한 때문인지 이 추위에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을 한 젊은 청년들이 꽤 있다. 산을 오를 땐 언제나 겸허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신은 수백수천 개의 얼굴을 예측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발아래 구름밭이 펼쳐지고 신들이 펼쳐 놓은 장엄한 풍경에 할 말을 잊는다.
드디어 공룡능선과 마주한다. 까칠하게 솟은 등을 밟고후들거리는 다리로 수직으로 미끄러져 내려와가슴 언저리와배 밑을 훑는다. 다시 거칠고 가파른 목을 타고 오르다 반대편 옆구리에 걸터앉으니 신도 부럽지 않다. 불어오는 바람에 세포를 탈탈 털어 헹구고 뇌관까지 청소를 한다.
공룡의 거대한 몸을오르락내리락하며숨이 끊어질 것 같은순간에너지음료를난생처음 마셨는데, 약발인지 갑자기 가벼워진 몸을 사뿐히 날려 마등령까지 질주한다. 예상시간보다 빠른 행보. 일행들은 선전(善戰)하는 나를 향해 기특하다며 폭풍 칭찬을 쏟아낸다.
오세암에서 약수 한 사발을 마신다. 점점 골이 깊어지는 세상의 탄식과 이곳은 별개의 세상이다. 그저 바람이 좋고, 단풍이 예쁘며, 스님의 불경 소리가 고즈넉한 산사일 뿐이다.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세상과 자신에 대한 숨을 고른다.
영시암을 거쳐 백담사 계곡물에 달구어진 무릎을 식힌다. 쏟아져 내린 단풍잎과 갈피를 잡지 못하는 계절의 갈등을 뒤로한 채 터벅터벅 걷는다. 지나온 길이 참으로 의리 있고 아름다웠노라고, 그러니 느려도 좋으니 문명은 이제 여기서 멈추어달라고 되지도 않는 소원을 하며 낙엽 하나를 집어 든다.
역시 나는 에너지를 다 소진시킬 만큼 강도가 센 운동이 맞는 모양이다. 소진시키고 난 에너지는 더 강한 무엇이 되어 일상에 큰 원동력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중 산을 오르는 것만큼 나를 치유해 주는 운동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고로 공ㆍ룡ㆍ능ㆍ선 덕분에 족히 열흘은 행복할 것 같다.걷는 건 언제나 내겐 옳다.
글을 쓰는 지금 에어팟은 쇼팽의 녹턴 전곡을 전달한다. 글 쓸 때 들으라며 보내준 지인의 섬세함 덕분에 늦은 밤 끄적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