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금북정맥, 낙동정맥, 낙남정맥, 땅끝 기맥, 영신 기맥 등 멀고도 험한 길을 산우들과 함께 하며
지나 온 시간들을 돌아보니, 가슴 한켠이 뭉클하고 많은 감정들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만나야 할 사람들은 언젠가는 꼭 만난다는 필연적 운명을 산에 오르며 체험했다.
완벽한 타인이었음에도 산길에서 찍어 준 사진 한 장의 인연으로 출판인들과 3년이란 시간을 함께 걷기도 했다.
도저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갈 수 없는 계곡에서 정신을 잃어 죽음의 문턱까지 닿았다 온 불가사의한 일도 경험했다.
살다 보면 힘든 날도 있는데, 나 역시 그럴 때가 있었던지라 신부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고 무작정 걸어 보라 하시던 신부님 말씀을 따랐다.
걷다 보면 복잡한 고리들이 풀리고 삶이 단순해질 거라셨다.
걷기 시작했다. 동네 뒷산(관악산)을 2년 동안 매주 다니다 보니 산 좋아한다는 소문이 모 산악회 대장님 귀에 들어가고,대뜸 같이 걷자는 제의와 함께 전지훈련이 시작되었다.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대장님은 갑자기 삼성산을 뛰게 했다. 친구랑 난 미친 사람 아냐 욕을 퍼부으면서 무려 7시간을 뛰었다.기진맥진 수렁에 빠진 생쥐 모양 혼이 반쯤 나갔고, 그 상태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니 묘한 끌림이 생겼다.친구는 떠났고 나는 그 산악회에 합류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길도 없는 잡목 숲을 러셀 하며 걸을 땐 제정신인가 싶었지만 고통 뒤에 오는 짧은 환희의 순간에 점점 중독되었다. 정맥길이라고 했다. 산우들이야 정맥이 어떠한 건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고통과 환희의 순간을 넘나들며 느끼는 중독 같은 현상들을 익히 알터이니 그저 공감하는 일로 만족한다.
백두대간을 함께 하자는 다수의 제안에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아 감히 엄두를 못 냈다. 그러던 중 모 산악회 백두대간 우정 산행을 나가게 되고, 속 깊은 산우들에게 생긴 믿음과 대간길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굳이 불필요한 설명이 필요 없는 산행, 걷는 매 순간은 고통과 환희의 반복이지만 가장 가까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2017년 5월 28일 일요일 새벽.
산행의 인연으로 뭉쳐진 4인방,안산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으로 오는 대원 한 명과, 나머지 셋은 안양에서 출발해 수원에서 합류한다
남진으로 진행하는 백두대간은 경기 하나 산악회 역사 이래 최초이고, 백두대간도 처음인 내게 이래저래 의미는남다르다.
가평휴게소에서 매식으로 아침식사를 한다. 들기름을 듬뿍 넣어 끓인 미역국과 나물 반찬은 집밥보다 훌륭하다,
젊고 패기 넘치는 베타 대장은 이미 외모에서 베테랑 포스가 흘려 넘친다. 젊은 나이인데도 이번 대간이 네 번째란다.
첫 출정식 제를 올리는 모습(진부령)
북진으로 진행하면 끝나는 지점 진부령에서 우린 반대로 남진을 위한 출정식을 한다. 무사 종주 산행을 염원하는 산우들은 매 순간 산신령의 보호가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진부령 표지석
강원도 고성군 홀리, 위도 38 º 15' 47.8" 경도 128 º 21' 40.8" 백두대간 종주를 알리는 진부령 표지석엔 위도 경도를 나타내는 숫자가 나열되어 있다
백두대간 종주 기념공원
백두대간 종주 기념공원진부령 고개, 가슴속에
뜨거운 불덩이가 솟구치고 눈두덩이가 아파온다.
백두대간 첫 출정에 대한 예를 다시 한번 갖춘다.
홀리마을 숲 길을 거쳐 폐가를 지난다. 바람에 실려 온 아카시아 향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이미 지고 없는 꽃들도 이곳에선 지천이다.
유년시절 아카시아 어린 줄기껍질을 까서 먹기도 하고 꽃을 따 쌀가루나 밀가루에 버무려 떡을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그리움이 5월의 여백을 비집는다.
맨 앞에 걷는 이 미소년!
놀랍게도 가장 무섭다는 중2 때부터 엄마와 함께 백두대간을 시작해 다음이 종주 구간이란다. 엄마의 강요로 시작했다지만 강요라고 해도 어디 쉬운 일인가. 두 모자의 모습을 산길 내내 나도 모르게 자꾸 훔쳐본다.
겨울과 봄 사이를 오가던 지난달의 기억을 계절은 잊은 듯, 초록으로 단장한 숲은 피톤치드를 왕성하게 뿜어낸다.
겨우내 황태를 말리던 덕장의 모습도 사라지고 밭을 일구던농기계가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노란 꽃들이 흐드러진 야생화 밭 모퉁이를 돌아 마산봉을 향해 본격적산행을 시작한다.
산꾼들의 시그널
바람을 타는 형형색색 시그널은 이곳을 스쳐간 산꾼들의 흔적을 말해준다. 무사 종주를 염원하던 그들의 기도가 우리 등에 업힌다.
이 길을 걸어봤음에도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변화무쌍함은 처음처럼 낯설다. 4월까지만 해도 눈이 무릎까지 쌓였었다.
"자연이란 참으로 알 수도 없고, 알기조차 힘든 위대한 존재 같네."
누군가 혼잣말을 한다. 숲 사이로 스며든 조각 햇살과 바람, 일렁이는 초록 물결에 취해 걷다 보니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마산봉을 목전에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