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1950m의 세계

겨울의 백록담을 오르다

by 정욱

11월의 어느 날, 서울에는 첫눈이 온다고 했다. 그런데 제주는 한없이 맑기만 했다. 맑은 것뿐만 아니라 기온도 높았다. 어지간해서는 영하로 잘 떨어지지 않는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에 있다는 사실을 이럴 때마다 새삼스레 다시금 깨닫곤 한다.


그래서 한라산을 올랐다. 눈을 보고 싶어서. 백록담에 소복하게 쌓인 눈은 맑은 날이면 지상에서도 맨눈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눈 보러와~” 하고 백록담이 내게 손짓하는 듯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세 번째이자, 제주에 내려와서는 두 번째 오르는 한라산이다. 불과 두 달 전에 갔던 것 같은데 또 간 걸 보면 동네 뒷산이기는 한 것 같다. 동네 뒷산치고는 좀 높긴 하지만 어쨌든.


팀원과 나는 ‘제주에 살면 백록담은 꼭 봐야지!’라고 생각하며 호기롭게 산행을 결정했다. 여기에 개인적으로는 눈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더해졌다. 나는 눈을 좋아한다. 그래서 군대에서도 제설작업을 하는 겨울이 좋았다. 그렇게 가득 쌓인 눈은 내가 살던 도시에서는 쉽사리 보기 힘든 풍경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우리는 완만하다는 성판악 코스로의 등산을 결정했다. 하지만 전날 과음을 한 탓에 나는 산을 타기 전부터 속을 게워내야만 했다. 어쩐지 불길한 시작이었다. 왜 한라산을 오르기 전날에는 항상 그렇게 술이 당기는 걸까.


설상가상으로 대피소의 매점은 파업으로 운행이 중단된 상태라고 입구에 쓰여있었다. 대피소에서 컵라면을 보고 싶었는데… 눈 덮인 융프라우에서 신라면을 먹는 일이나 눈 덮인 한라산 대피소에서 컵라면을 먹는 일이나 결국 비슷한 일 아니던가? 대리만족이라도 할까 했는데, 시작부터 조금 실망했다. 그러나 빨리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허기진 배를 채우자고 하고 팀원과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간식거리 조금과 물만 사서 산을 올랐다. 해발 1950m의 백록담을 향해서.

처음에는 완만했다. 지난번 영실로 오른 경험을 생각해보면 진짜 너무나도 쉬운 코스였다.

그러나 역시 한라산은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그래 아무리 완만해봤자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산인데..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지. 길에는 영실과는 달리 울퉁불퉁한 돌이 많아 발바닥에도 부담이 많이 되는 코스였다.

점점 더 가빠져 가는 숨을 참으며 진달래 대피소에 다다랐다. 역시나 풍경을 감상할 시간 따위는 거의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앞사람의 등이거나, 끝없이 펼쳐진 경사로였다. 오르는 동안 기온은 조금씩 낮아졌다. 기온이 낮아짐에 따라 녹지 않고 쌓여있는 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달래 대피소는 완연한 겨울이었다. 햇살이 가득한 산 아래의 제주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백록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진달래 대피소는 역시나 파업 중이었고, 우리는 가져온 초콜릿 조금과 물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른 이들은 전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듯 했는데, 그에 비하면 우리는 아니, 나는 동네에 마실 나온 청년 느낌이었다. 추리닝에 맨투맨, 그 위에 후드티를 걸친 몰골이라니. 다신 그렇게 한라산을 오르지 않으리라.

그리고 우리는 다시 백록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여기서부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산 아래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무수히 많은 육두문자를 날렸다는 사실 밖에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백록담에 올랐다. 주위를 둘러싼 풍경에는 조금씩 하얀색이 점점이 박히는 듯하더니 이내 온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눈앞이 하얘진 것도 있었지만) 지상과는 다른, 눈의 세계, 겨울의 땅이었다. 기이한 모습의 나무와 하얀색 눈들을 기묘한 대조를 이루며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백록담의 모습은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절대 담을 수 없는 웅장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눈에는 다 들어오지도 않는 그 거대한 분화구 앞에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너무 추워서…도 있었지만, 그런 풍경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황량하고 거대한 그 오목한 빈 구덩이는 자연의 신비함, 태초의 웅장함 그 자체였다. 저 까마득한 분화구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라산의 최정상, 백록담은 너무나도 추웠다. 바람은 사정없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나를 날카롭게 베며 지나갔다. 눈도 얼음도 바람도 모두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곳이었다. 자연이 한낱 인간인 나를 크게 혼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디 감히 그렇게 대충 하고 여길 올라?”

백록담의 정신없는 바람에 얻어맞던 우리는 성판악이 아닌 관음사 코스로 내려가기로 했다. 지칠대로 지쳐있는 상태에서 조금이나마 빠른 길로 내려가자는 판단이었다.


그건 올해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


관음사 코스는 절대로 성판악 코스보다 빠르지 않았다. 국가가 양심이 있다면 이 코스는 국가 차원에서 폐쇄해버려야 한다며 온갖 성질을 부렸다. 내 기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코스로 오는 사람들은 평소 고통을 즐기는 스타일인가? 싶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여기서 굴러버릴까 그러면 헬기가 와서 데려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수십번도 더 했지만, 어쨌든 살아야 했기에 관성적으로 발을 내딛다 보니 어느새 아래에 도착해있었다.


텍스트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관성적으로 발을 내딛다 보니 어느새 아래에 도착해있었다’라니. 정말 죽을뻔했던 네 시간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렇게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니.


어쨌든 길고 길었던 산행이 끝나고, 우리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약 일주일 동안이나 이어진 다리 통증을 수반한 채로.


*주위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백록담을 오르는 일은 철저히 준비하고 사전에 충분한 연습을 거친 뒤에 올라간다고 한다. 절대 우리처럼 무모하게 도전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정말 큰일이 날수도 있다. 그리고 겨울 산행에 있어 아이젠은 필수다.


*위의 글은 제가 소속된 카일루아라는 회사의 서비스 '데일리 제주'에 실렸던 콘텐츠입니다.

*콘텐츠의 저작권은 데일리 제주 및 제작자인 저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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