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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Apr 10. 2019

단 한 번의 완벽한 꽃놀이

세상엔 단 한 번만 겪을 수 있는 종류의 완벽한 경험이 있다. 그 한 번의 완벽한 경험 뒤에 오는 것들은 모조리 이 경험의 아류가 되어버리는 그런 일들. 내게는 봄철의 꽃놀이가 그랬다.


언제부턴가 매년 봄마다 찾아오는 꽃놀이는 더 이상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리하여 4월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의미도 아니게 되었다. 처음엔 그게 단순히 나이 들었기 때문인 줄 알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십 대의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아니었고, 터지는 꽃봉오리에 설렐 정도로 인생이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꽃을 보기 위해 굳이 어딘가를 향할 정도로 시간과 체력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 종일 바닥을 보며 걷는 게 일상이었고, 그때마다 내가 보는 건 나뭇가지에 활짝 핀 꽃이 아니라 다 떨어져 볼품 없어져버린 꽃잎이었다.


하지만 내 나이의 모든 이들이 그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봄이 되면 가깝게는 여의도로, 멀게는 진해와 부산으로 꽃놀이를 떠났다. 그리고는 SNS에 노랗고 하얀 개나리며 벚꽃을 찍은 개성 없는 사진들을 잔뜩 올려대는 것이었다. 뭐지, 내가 너무 시니컬하고 매사에 염세적인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나도 예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러던 어느 날, 외장하드 한 구석에 처박혀있던 사진 폴더 하나를 발견했다. 제기랄, 왜 하필 그날 사진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걸까. 나는 '2015.04.17.'이라고 적힌 심플한 폴더 위에 커서를 갖다 댄 뒤 아무 생각 없이 마우스를 더블 클릭했다. 폴더가 화면에 띄워짐과 동시에 나는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연 기분으로 '아 맞다'하고 탄식을 내질렀다.


그건 내가 혜선이와 사귄 지 5년째 되던 해에 함께 간 꽃놀이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2015년 그 해 봄, 우리는 벚꽃을 보러 한강으로 향했다. 별다른 설렘도, 대단한 기대도 없었다. 그저 의무와 습관만이 들어찬 권태로운 커플의 흔해빠진 꽃놀이였다. 적어도 처음엔 그랬다.


하늘은 그날따라 유난히 파랬다. 미세먼지 없는 말끔한 봄날의 하늘이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햇살은 따스했고, 바람은 적당했으며, 꽃은 딱 알맞게 만개해있었다. 그저 그런 소설에서 아무런 고민 없이 적어 놓은 묘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한 하루였다.


한강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혜선이는 서 있던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날씨 너무 좋다. 우리 사귀고서 5년 동안 매년 꽃놀이를 오면서도 이런 날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한 번쯤은 있지 않았나?"


"아니야 없었어. 어느 날엔가는 비가 와서 돗자리까지 폈다가 급하게 다 접고 근처 치킨집에서 닭이나 뜯다가 잔뜩 취해서는 둘 다 기억을 잃었고, 어떤 날엔가는 미세먼지가 가득해서 도저히 밖에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잖아. 또 작년엔가는 우리가 갔던 공원에서 하필 유명 가수가 버스킹을 한다고 하는 바람에 사람에 치이느라 제대로 구경도 못했고."


"아 맞다 그랬지. 너 말 듣고 보니 진짜 한 번도 제대로 꽃놀이를 즐겼던 적이 없었네"


나는 그녀가 매 해 꽃놀이를 그렇게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그녀의 말처럼, 완벽한 꽃놀이는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날은 비 때문에, 어느 날은 미세먼지 때문에, 또 사람들 때문에. 완벽한 꽃놀이를 방해하는 요소들은 우리 도처에 널려 있었던 거였다.


그날은 모든 것이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각본처럼 완벽하게 흘러갔다. 기온은 적당했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그녀와 내가 각자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으며, 적당히 모여 있는 사람들은 풍경에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꽃잎이 떨어지는 풍경을 배경으로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었다. 데이트를 하면서 싸우지 않은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그렇게 사진 속에 남아 외장하드 한 구석에 처량하게 처박혀있었다. 완벽했던 날을 남겨두기 위해 기록해둔 사진들이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행복했던 시간은 그렇게 사진 속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무난하고 평범했던 하루의 시시한 반전이라면, 그날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 정도였다.


"너랑 싸우면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어. 그렇다고 시시하게 헤어지기도 싫었고. 그래서 지금 헤어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거야. 오늘처럼 기분 좋은 데이트를 하고 난 날이면, 행복하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겠다고."


너무도 단호했던 혜선의 말 뒤에, 나는 차마 다른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그 날의 꽃놀이는 그렇게 그녀의 이별통보로 깔끔하고도 완벽하게 마무리됐다.


이게 내가 꽃놀이가 시들해진 이유다. 나에게 그날보다 더 완벽한 꽃놀이는 더 이상 찾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거나 꽃이 싫어진 게 아니라, 단 한번 있었던 그날의 완벽한 경험 이후로는 모든 꽃놀이가 모조리 아류로 전락할 뿐이라는 것을.


세상에는 이렇게 단 한 번만 완벽을 경험할 수 있는 부류의 일이 있다. 혜선이와의 완벽했던 꽃놀이는 내게 황홀한 저주가 되어버렸다. 나는 죽을 날을 받아둔 채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노인의 심정이 된 것만 같았다. 완벽한 꽃놀이. 그건 혜선이가 나와 헤어지며 내게 내린 축복이자 저주였다.


당신은 완벽한 꽃놀이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하루빨리 경험하기를, 그리고 경험한 당신에게는 애도를 표한다.


https://www.instagram.com/jw_yoon_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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