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욱 Jan 17. 2020

재희

재희와 나는 같은 동네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녀는 여중 여고를 나왔고 나는 남중 남고를 나왔으니 우리가 같은 학교였던 적은 당연히 한 번도 없었다. 나와 재희는 학원에서 만났다. 학원이 학교와 다른 점은 나와는 성별이 다른 존재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나이 때 학생들에게 이성은 늘 호기심과 미지의 대상이게 마련이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많은 사랑과 이별을 겪었다. 그러나 나와 재희가 연인인 적은 없었다. 연애 감정을 느끼는 사이도 아니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그리 친하지도 않았다.


학원에서 재희를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아니, 동네에서 재희는 꽤나 유명한 여자아이였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이기도 했으나, 재희의 유명세는 그녀가 가진 예쁘장한 외모와 과거의 연애 이력들 때문이었다. 재희는 중고등학교 시절 끊임없이 연애를 했다. 그것도 소위 '잘 나가는'남자애들과만 말이다. 전교에서 성적이 상위권인 여학생이 외모도 예쁘고 심지어 잘 노는 애들과 친하기까지 하다면, 그 아이는 어느 동네에서든 유명해질 수밖에 없다. 재희는 마치 외모에 가창력이 묻혀 속상해하는 가수 같았다. 언제나 그녀를 따라다니는 소문들은 아주 질 낮은 가십들 뿐이었다. 세상 모든 가십거리가 그러하듯이, 그 소문들에도 근거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소문을 믿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희와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학창 시절의 나는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만약 학교 운동장에 남고생들을 한 50명 정도 일렬로 쭉 세워놓고 한 명씩 뽑아 간다면, 나는 32번째 순서쯤에야 겨우 눈에 띌 법한 아이였으니까. 그런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이 연예인 임수정을 닮아 예쁘장하고 공부도 잘하고, 심지어 잘 놀기까지 한다는 아이와 친해질 확률은 거의 0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러니 내가 그녀에게 밥 한 끼 먹자는 문자를 받았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핸드폰에 뜬 그녀의 이름을 보고 든 생각은 '내가 뭘 잘못했나?'였다. 그 생각은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고 난 뒤에 '나 같은 찐따한테? 세상에'로 바뀌었다. 재희가 내가 입학한 학교 근처의 여대에 들어갔다는 얘기는 건너 건너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인사도 몇 번 안 하던 학원 같은 반 조용한 남자애에게 연락을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야! 이진욱!"


재희가 저 멀리서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여전하구나, 싶은 모습이었다. 그래, 재희의 인기 요인에는 털털함도 한몫했었지. 재희가 다가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어쩐 일이야. 연락해서 깜짝 놀랐네. 다단계는 아니지?"

"미친. 아니야 그런 거. 친구끼리 연락도 못하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히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그 질문에 재희는 서운하다는 말로 화답했다.


"와, 난 그래도 너랑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하네. 학교에서는 선배들이 밥도 안 사줘. 아 나도 남녀공학 갈 걸 그랬다~ 여중 여고 여대라니 최악이네 정말. 너네 학교 가까우니까 친구 하면 좋지 뭐. 가끔 밥이나 먹자"


사람마다 친함의 기준이 다를 수는 있지만, 너랑 나랑은 친하다고 보긴 좀 어렵지 않았냐는 말을 하려다가 나는 그만두었다. 우리는 그렇게 친해졌다. 세상 물정 모르고 밝고 털털한 그녀의 성격과, 내 소심함 덕분에. 그렇게 종종 만나서 식사를 하던 어느 날, 재희가 갑자기 어떤 영화를 같이 보자고 말했다. 내 의견이 궁금하다는 거였다.


"야 무슨 연애도 하는 애가 영화를 나랑 봐. 남자 친구랑 봐."

"아 아니야 이건 꼭 너랑 봐야 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단 말이야."

"뭐가 궁금한데?"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는데, 남자 친구랑 한 번 싸워보고 싶어"

"응?"


이건 무슨 참신한 헛소리인가 싶어서 말문이 막혔다. 재희의 말은 이랬다. 남자 친구랑 5년을 넘게 사귀었는데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서 다들 이런 줄 알았다고 했다.


"흠... 한 번도 안 싸우는 커플은 잘 없기는 하지."

"그래서 한 번 싸워보려고 내가 막무가내로 화를 한 번 냈거든 얼마 전에?"

"응 그런데?"

"얘가 꿈쩍도 안 하는 거야. 그냥 자기가 잘못했대. 걔가 그래 버리니까 내가 더 화를 내기가 좀 민망하더라고."

"착한 친구네. 와 너 진짜 미친놈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뭐가 다 잘못 한 거지? 잘못은 내가 한 거잖아. 근데 왜 지가 미안하다는 거야."

"뭐... 그러니까 싸우질 않고 화내질 않아서 남자애가 재미가 없다? 나쁜 남자가 좋다? 와 윤재희도 나쁜 남자가 좋구나."

"나쁜 남자 뭐 그런 게 아니라, 아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말한 영화를 보고 의견을 좀 말해달라는 거야."

"무슨 영환데?"

"연애의 온도"


<연애의 온도>라니. 뭐 그런 영화를 나랑 보나 싶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둘이 카페에 나란히 앉아 노트북으로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는 사귀다가 헤어진 남녀 둘이 정말 '지긋지긋'하게 싸우는 영화였다. 화면 속 두 배우는 치열하게 싸웠고, 어쩐지 그 모습에선 사랑이 느껴졌다. 왜 재희가 이 영화를 보자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흠..."

"어떤 것 같아?"

"왜 보자고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저렇게 싸우면 어떤 기분일까? 어떨 것 같아 너는 헤어진 여자 친구랑 다시 만나고, 징글징글하게 싸우고 그리고 다시 헤어지고 그러면?"

"그건 잘 모르겠는데, 왜 그런 말 있잖아.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라고. 서로에게 소리 지르고 욕하고 상처를 주는 일도 어쩌면 사랑일 수도 있긴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애정표현의 왜곡된 방법이랄까... 그래서, 저렇게 싸우고 싶다고? 세상에."

"아, 뭐 그렇다기보다는...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 네 말처럼 악플보다 무서운 무플 같은 느낌이랄까."

"음... 세상에 수많은 커플이 있으면 그 안에 수많은 모양의 사랑이 있는 거잖아. 남들은 이해할 수 없고 단지 둘만 알 수 있는 그런 게 결국 각자의 사랑 아닐까?"

"흠... 연애도 많이 안 해본 놈이 말은 잘하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냥 남자 친구랑 싸우지 말고 잘 사귀라고. 애정표현 저렇게 하지 말고."

"알겠어. 야 술이나 마시러 가자."


5년을 사귄 남자 친구와 싸우고 싶다는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며, 나는 이전의 연애들을 떠올렸다.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던가?', '사소한 말싸움은 있었던 것 같은데.' 영화 속 커플들처럼 싸우진 않았어도 나 역시 무수히 많은 갈등 속에서 사랑을 했다. 상대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혹은 그녀에게 실망하고 화를 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내 기대에 부응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 이에게서 사랑을 느낄 수는 있는 걸까? 기대 없는 사랑은 가능할 걸까? 그런 복잡한 생각들을 하며 홍대 거리를 걸었다. 재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소주에 곱창을 노래 부르고 있었다. 나는 '내가 곱창 싫어한다고 말 한 적 없었나' 하고 생각했다.


이전 02화 수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