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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06. 2020

'뽑아만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의 위험

맞는 일과 맞지 않는 일

프리랜서 겸 백수로 지낸 지 2년이 되었다.


지인들은 백수라 말하는 나에게 '에이 무슨 백수야 작가지'하고 말하지만, 사실 백수라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 2018년 10월에 회사가 어려워져 제주 생활을 정리하고 올라온 뒤, 작년 초까지는 쉬는 겸 출간을 위해 원고를 썼다. 때문에 구직활동을 하지 못했다. 책은 6월에 나왔지만 강연이나 행사, 출간 기념 약속을 다니다 보면 출간 후 두 달 정도는 보통 정신없이 바쁘다. 구직활동에 시간을 온전히 쏟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활동들,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 강연 중

본격적으로 재취업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 2019년 9월쯤이었다. 회사생활을 아예 해본 적 없는 신입이라면 일단 내가 할 수 있을 법한 직무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집어넣었겠지만, 지난 몇 년의 회사생활을 근거로 나는 그런 짓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물론 이전 직장들의 경우 직무가 안 맞았다기보다는 다른 일에 도전해보기 위해 그만둔 이유가 훨씬 더 컸지만, 내 경험보다는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얻은 데이터베이스가 있었다. 일이 본인과 맞지 않아 병을 달고 산다거나,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결코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로지 회사에 들어가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묻지 마 지원을 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취업 컨설턴트나 유튜버들을 보면 일단 한숨부터 나온다. 거... 그쪽이 사람 인생 책임지실 겁니까? 하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마음가짐이었는데, 구직활동이 1년을 넘어가는 이 시점이 되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이력서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경력이 있다 보니 아주 무관한 직무에 지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전혀 흥미가 없다거나 하고 싶지 않았던 직무에도 이력서를 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겪은 일로 인해 나는 다시 한번 그러한 행동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위험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사실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브런치에 글을 올린 바로 그날부터 3일을 업로드하지 못했다. 아주 많이 민망하다. 괜히 그런 글을 썼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이력서를 넣은 회사의 사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영상편집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는 편집이었다.


근 2년 정도 영상편집에서 손을 놓고 있었는데, 프리미어 창을 켜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진회색의 화면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시퀀스 설정을 맞추고 ctrl+I키를 눌러 영상을 임포트하고 컷 편집을 시작했다. 하기 싫어 죽겠는 마음과는 달리 내 손은 컷 편집을 수행하는 동안 c와 v사이를 현란하게 움직였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예전에 예비군에서도 한 적이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일 말이다. 대학생 시절 일주일씩 밤을 새워 가며 편집하던 시절 내 몸에 밴 습관은 무서웠다. 그렇게 2시간 분량의 영상을 10분으로 줄여나갔다. 꼬박 하루 반나절을 잡아먹었다.

끔-찍

다음날부터는 자막, 효과음, 배경음악 등의 후반 작업을 시작했다. 이미 이틀 동안 잠은 두 시간씩 밖에 자지 못한 상태였다. 1시간을 투자하면 1분을 완료하는 그 과정 속에서 나는 고통을 느꼈다. 진심으로 아주 오랜만에 심적 옥죄여옴, 스트레스성 탈모, 푹푹 내쉬는 한숨 등을 되찾았다. 불과 3일 만의 일이었다. 무책임하게 보일 각오를 하고 작업을 중단하기로 하고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지만, 해당 직무는 저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이다. 들어가 봤자 피차 피곤한 일만 생길 것 같았다.


그렇게 내 발로 주어진 기회를 발로 차 버리고 난 뒤 꽤 심한 자괴감에 시달렸다. 백수생활이 길어져 나태해지고 타성에 젖은 것은 아닐까, 인내심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사실 모두들 참고하는 건데 넌 뭐가 그리 유난이냐. 등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과연 내가 그 회사 과제를 무사히 성공하고 남은 과정을 거쳐 입사를 했다고 한들 만족스러웠을까? 차라리 운이 좋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른 채 회사에 들어가는 신입들이 얼마나 많던가. '다들 이러고 사는 거지'라며 꾹꾹 자기와는 맞지 않는 일을 밥벌이의 고단 함이라는 이유로 참아가며 하다가, 결국 폭발해서 병이 생기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봤다.

첫 직장, 마지막 출근길

오랜만에 켠 프리미어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꺼버린 뒤, 3일 동안 쓰지 못했던 글을 몇 시간씩 써 내려갔다. 키보드 위에서 내 손은 신나게 움직였다. 똑같이 내 손은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지만 프리미어 컷 편집을 할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때는 그 과정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즐거웠다. 오히려 그 고통이 나를 성장시켜준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한 영상편집에는 순수한 고통 그 자체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내가 어떤 일에 더 잘 맞는지를 알게 됐다. 영상편집을 할 수는 있지만, 그걸 평생의 업으로 삼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을. 한때 PD를 생각했고 영화감독을 꿈꾸며 독립영화까지 만들었던 사람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나도 도저히 모르겠지만. 사실 이게 내가 주변에서 유튜브를 하라는 데도 안하는 이유다. 영상보는 건 좋지만 편집은...음.


예전 스타트업에 근무하며 사람을 뽑을 때 누누이 말했던 말이 생각난다. "저희도 지원자님을 면접 보지만, 지원자님도 저희 회사가 맞는지 면접을 보시는 겁니다." 이 말이 그냥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취업준비생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대부분은 그냥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맞지 않는 연인은 관계를 유지시켜 나갈 필요가 없듯이, 맞지 않는 회사와 직원도 굳이 그 관계를 유지시킬 필요가 없다. 꾸역꾸역 유지시켜나가는 관계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회사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고 우리는 조선시대의 노비가 아니니까. 그러니 취준생이라면 워라밸 말할 시간에 자신과 맞는 일을 찾길 바란다. 자발적으로라도 야근하고 싶어 안달이 날 테니까.


보통 영상, 글, 사진을 모두 아우르는 콘텐츠 제너럴리스트라고 하고 다녔는데 거기서 영상 비중은 조금 줄여야겠다. 물론, 그래도 뽑아만 주신다면 열심히 이 한 몸 바쳐서 일은 하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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