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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Feb 06. 2021

찬물에 라면 끓이는 것과 콘텐츠 작가가 무슨...

아무 상관이 없기도 하지만 또 깊게 관련이 있기도 하다

며칠 전 이론 물리학자 김상욱 박사의 라면 끓이는 법에 대한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레시피는 아래와 같다.

 

냄비에 라면과 수프, 물을 모두 한꺼번에 넣는다.

물이 팔팔 끓어오르면 계란을 넣고 30초간 기다린다.

이제 파를 넣고 10초간 더 끓인 후 맛있게 먹는다


오호, 물리학자가 사고 실험을 한 후 직접 실험으로 이어진 새로운 패러다임의 라면 레시피라… 게다가 이렇게 하면 시간과 에너지도 절약할수 있구만! 당장 물에 라면 한 봉지를 다 때려 넣고 인덕션 풀파워로 불을 올렸다.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자마자 계란을 넣고 타이머로 30초를 잰 후 대파를 넣자마자 10초 만에 불을 꺼서 잘 저은 다음 한 젓가락 했는데…

그냥 이렇게 다짜고짜 끓이면 된다

조금 애매하다. 김상욱 박사가 유달리 꼬들면을 좋아하는 타입이라고 하기에는 면이 좀 많이 덜 익었고… 또 면이 안 익었다고 하기에는 어느 정도 익어있고…. 식구들에게 라면 종류를 일일이 바꿔가며 하나씩 끓여줬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레시피 오류라기보다는 화력의 문제다. 인덕션은 일반적으로 가스레인지 불에 비해 물이 빨리 끓는다. 아마 김상욱 박사의 레시피는 가정용 가스레인지로 라면을 끓였을 때의 레시피인 것 같은데, 그 레시피 그대로 인덕션에 라면을 끓이면 가스레인지로 조리할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뜨거워져가는 물과 면이 접촉하는 시간이 짧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인덕션으로 끓이면 면이 설익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보완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기본적으로 면이 더운물에 닿는 시간을 늘려야 하니, 대파를 넣고 10초가 아닌 30~40초 정도 더 팔팔 끓이면 면이 알맞게 익게 될 것이다. 이때 문제는 계란이 너무 오버쿡 된다는 것. 취향 차이인지는 몰라도 노른자가 퍽퍽한 계란은, 최소한 라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를 굴려 김상욱 박사의 레시피를 인덕션 용으로 재구성해보자. 더워지는 물과 면의 접촉 시간을 늘리는 동시에 계란의 조리시간을 줄이려면…. 뭐 간단하게 계란을 물이 끓고 30초 후에 계란을 넣은 후 나머지는 김상욱 박사의 레시피대로 하면 되지만 최대한 타이머를 덜 쓰기 위해 다른 방법을 고민해봤다. 개량이 끝난 레시피는 이렇다.


냄비에 라면과 수프, 물을 모두 한꺼번에 넣는다. 이때 물은 계란 한 알 정도인 맥주컵 1/3컵 또는 소주 2잔 정도 빼놓는다

물이 팔팔 끓어오르면 거기에 빼놓은 물을 다시 부어 넣는다. 이렇게 면이 물과 닿는 시간을 늘린다.

다시 물이 끓어오르면 계란을 넣고 30초간 기다린다. 보통 애국가 1,2절 가사를 중얼거리는 시간 정도

이제 파를 넣고 불을 끈 후 뚜껑을 덮어 애국가 3절을 외운 다음,  맛있게 먹는다

사진은 제가 찍은 거 아님 주의. 이렇게 예쁘게 나오진 않지만 맛은 좋.....

이 과정대로 인덕션으로 라면을 끓이면 살짝 꼬들꼬들한 최상의 라면을 맛볼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건 인덕션 기준 레시피다. 계란 넣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3번 과정에서 조금 고민을 해봐야겠지.


프로그래밍 언어 코드를 두드리던 손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늘 어떤 자격지심 같은 게 있었다. 내 주변 기자나 매체들에 보이는 글은 물론, 가끔 블로그나 페이스북에서 보는 번뜩이는 문장을 볼 때마다 ‘그때 국문과를 전공했더라면’이라는 생각과 함께 내 글줄이 초라해 보였다. (글빨 나아지려는 노력은 개뿔, 그때마다 술이나 마신 건 비밀)


그런데 내가 단점인 줄 알았던 이공계 졸업이라는 딱지도 도움이 될 때가 있더라. ‘눈이 녹으면 ** ***’에서 ‘*’표 부분을 채우라고 하면 문과는 ‘봄이 옵니다’ 라는 식으로 감성적으로 이야기 하고 이과는 ‘물이 됩니다’라는 식으로 상황을 과학적으로 분석 한다고… 무늬만 공대라고 생각하던 나도 별 수 없는 공돌이였다.

어떤 경우에는 온도가 높은 물이 빨리 얼기도 하는 음펨바 효과도 막 떠오르고...

문제가 있어 보이는 라면 레시피를 만났을 때 ‘에이 맛없어’, ‘이건 좀 아닌데?’가 아니라 ‘더워지는 물이 면과 만나는 시간’ 운운하며 레시피를 검증하는 따위 짓들은 이공계 아니면 할 일이 없지. 문과 출신 작가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지고 있달까.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못 넘어가는 호기심 많은 성격도 글쓰기에는 도움이 되는 듯하다. 이거 봐. 라면 안 익는 이유를 굳이 이렇게 집요하게 궁금해하며 글까지 따로 쓰고 있지 않나. 이러다 보니 인터뷰나 취재 현장에 갔을 때도 남들과는 다른 포인트를 잡아낼 수 있다. 맛집 콘텐츠나 여행기도 이러한 호기심 많고 즉흥적인 성격 탓에 콘텐츠의 방향이 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직접 몸으로 받아내며 깨달은 제주 환상 자전거길과 제주 환장 자전거길의 차이

무턱대고 떠난 제주 자전거 여행에서 얻는 ‘역풍’에 관한 팁과 서울대 폐수영장의 비밀, 여행 중 알게 된 일본 인디 뮤지션, 단골 돈카츠 집에서 고심 끝에 고기를 교체한 이야기… 여행 갈 때 계획을 따로 짜지 않는 것도 내 호기심 때문이다. 계획을 짜면  뭐해. 일정이고 뭐고 궁금하면 들어가 보고 만져보고 사보고 마셔보느라 하나도 못 지키는걸…


사람들은 ‘그만 철 좀 들라’고, 이제 좀 정상적인 패턴으로 살라고 하지만 고마 됐다 마. 일할 때나 계획 짜서 단계별로 착착착 진행하는 거지 편하게 놀고 즐기며 경험할 때 꼭 그리 팍팍할 필요 있나. 그래도 콘텐츠 작가로서 무기가 두 개 정도는 있는 거 같아 왠지 기분이 좋구먼.



#라면레시피 #인덕션라면 #찬물에라면 #공돌이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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