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매큐언(2019). 검은 개. 문학동네
시대가 소설을 만나면 태평성대일까? 그럴리는 거의 없다. 태평성대에 무슨 신과 시대에 통찰이 필요하던가? 고뇌와 번민에 가득 찬 지식인들이 펼쳐놓는 시대정신이 나올 수 있을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통일이 어느 날 미디어를 통해 세상에 퍼질 때 감흥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기억해도 그 감격이 우리한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미리 내다볼 선견이 있었던가? 우리도 그럴 수 있을 거란 기대에 충만했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렇게 시대가 주는 통찰도 기억 속에서 흐려졌다. 비 오는 날 창 밖으로 내다볼 때 그 풍경처럼.
비록, 소설이지만 유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벌어졌던 세계대전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통일이 시대를 관통하면서 그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미쳤는지 단서를 조금이나마 제시한 소설. 그걸 지키려는 한 남자. 버나드. 그가 가진 신념과 가치관, 그가 옳다고 바라본 시대를 바라본 통찰은 무엇이었으며 그게 옳았을까?
“악과의 정면 대결? 그날 이 여자가 겪은 일이 뭔지 내가 말해주지. 점심 대접 한번 잘 받고 촌동네 뜬소문을 들었던 것뿐이야. 내면세계라, 사위, 어디 배곯으면서 내면세계 한번 찾아보라지. 아니면 깨끗한 물 없이. 아니면 단칸방에 일고여덟 명이 같이 기거하면서 말이야. 아, 그리고 물론 누구나 프랑스에 집 한 채가 더 있을 때도. 이 복작거리는 작은 지구에서 세상일이 돌아가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사상이 필요해, 그것도 아주 죽여주는 사상이!”(p.245).
한때 이념적 동지면서 결혼까지 함께한, 지금은 결혼이란 형식으로 갇힌 채 부부관계를 유지한 준에게 세상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신혼여행 산책 중에 만난 검은 개의 위협 때문이다. 그게 그녀에게 악으로 와닿았기에. 그럼 생명을 벗어난 인간의 정신이나 마음, 의식이 무슨 의미일까? 세상은 자기 남편 버나드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성과 과학적 사상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검은 개를 만나고 나서.
"제러미, 그날 아침 나는 악과 정면으로 맞섰어... 이 개들은 타락한 상상력이, 어떤 사회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변태적인 정신이 만들어낸 산물이었어. 내가 말하는 악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고 있지.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 사적인 생활 속에, 가정에 뿌리를 내리고...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마음, 정신, 영혼, 의식, 뭐라고 부르든 그것은 결국은 우리가 개선해 나가야 하는 거야... 내면 세계의 혁명 없이 거창한 설계가 다 무슨 소용이야... 어느 특정 집단이나 사상의 통제를 받지 않고 말이지......"(p. 244)
읽다 보니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이 다르다고 이게 부딪칠 때 어떻게 이를 재단할 수 있을까? 어느 게 옳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여기에 그게 부부라면? 육체적 결합과 그로 인한 결실로 종족을 유지하는 동물이란 범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부부가 영혼이나 사상까지 일치해야만 할까? 이 소설은 결코 답을 주지 않지만, 답을 줄 수도 없으니 말이다.
주인공 준과 버나드는 부부지만 이게 일치되지 않는 서로 다른 가치관과 생각이 다름을 평행선으로 보여준다. 그럼 남편 버나드는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그럼 아내 준은 시대를 벗어난 것인가? 우린 사상적 격변기인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보내면서 과학적 사상과 전망으로 무장한 일군의 사람들과 시대정신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럼 지금은? 그때 시대를 앞서간다는 누군가들은 이제 시대에 묻혀 그렇고 그런 세대로 전락했거나 새로운 신세대에 선배로써 모범이 되지 못하고 사그라들어버렸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자괴감일까? 이게 맞다면 버나는 세상을 잘못산 것일까?
"내 행복을 그 개들에게 빚졌다고 생각하면 곤혹스러운 느낌이 든다. 특히 그 개들을 동물이 아니라 영적인 사냥개로, 그 현신으로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다 그곳으로 돌아와 우리 곁에 유령처럼 출몰해 떠돌 것이다. 유럽 어딘가에서, 언젠가는" (p. 246)
시대에서 요구하는 정신과 역사와 개인의 신념과 여기에 사랑이 만나면 어떻게 전개될지, 그게 유럽의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도, 우리도 이미 1980년대 이후를 겪고 있기에 그저 소설이구나 하고 넘길 수 없었던 소설. 시대가 소설을 만나면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 하나의 전형이 된. 그게 폴란드의 유대인 수용소를 넘어, 장벽이 무너지던 베를린, 인적이 드문 프랑스의 고원을 넘어 한국에 이르도록 자꾸만 생각하게 만든다. 여전히 우리 곁에 작가가 주장하는 유령처럼 우리 곁에 여전히 떠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