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 있었는데, 내용이 뭐더라. 굳이 내용도 잘 모르는 영화를 떠올린 것은 정말 바람이 많이 불어서이다. 봄바람. 그렇지. 봄바람이다. 그것도 엄청 불었다. 여기에 한강 변이니 더욱 그러하겠지. 여기서 잠깐! 누군가 조어로 말을 만들어놓으면 두고두고 써먹는다. 이 문장, 바람 불어 좋은 날도 마찬가지. 바람은 엄청 불었는데 뭐가 좋았을까? 그래서 사실 바람 불어 망쳤는데 망쳤다고 하기에는 또 생각해 보면 망친 것도 아닌 듯하다. 시원시원한 강바람 실컷 쏘였으니. 바람 불어 좋긴 좋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 좋을 것 다 좋아질 것 같다.
한강변을 자전거로 씽~하고 달려서 한강변이 피크닉 하기 좋은 장소인 줄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한강은 자전거 타기 좋은 곳으로만 인식했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소문이 났나 보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바람 부는 언덕에서 젊은 남녀가 피크닉을 가서 노닥거리는, 어디서 본 듯하지 않던가. 그런 기분 느끼러 피크닉을 갔다. 물론, 내가 주체가 된 것은 아니지만 슬쩍 꼈다. 젊은이들 틈에서 말이다. 오늘, 바람도 바람이지만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나무들 중에서 아주 키 큰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옛날 시골 강가나 냇가에 자주 봤던 미루나무. 그 미루나무가 눈에 많이 띈다. 미국에서 들여온 버드나무라서 미루나무라던가. 갑자기 어릴 적 시대로 소환된다. 그런데 지금 느낌이 그때 그 느낌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저 바람에 휘날리는 나무가 보기 좋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온도가 좀 낮아진 것 빼면 나들이하기 좋은 일요일이다. 여전히 한강변에는 자전거족들이 씽씽 건강을 만끽하고. 어제보다는 날씨가 괜찮고 온도가 올라갔지만 자전거 타기에는 좀 추웠을 것이다. 다행히 그 일행 중에 내가 없었으니. 오늘은 자전거가 아니라 그저 시간 죽이러 왔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그것도 다른 연령대 이런 기회가 그렇게 흔하던가.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으니 달리 방법이 없잖은가. 순응하는 것이 최선의 답이지만. 그래도 좋다. 낯설지만 언제가 서로 볼 일이 없어지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오늘을 그저 즐기면 되지 않던가.
오늘 만남의 장소는 잠원 한강공원. 한강에 공원이 몇 개인지 알고 싶지 않지만 군데군데 많은 곳에 시민들이 즐겨 찾아왔으리라. 잠원 한강공원은 말 그대로 잠원동에 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굴다리 쪽이 보인다. 그래서 굴을 지나가려고 앞을 보는데 앞에서는 이미 젊은 남녀가 손을 잡고 가고 있다. 예뻐 보였다. 굴은 어두웠고, 반대 녹색이 펼쳐지는 공간은 밝아서 시각적 대비가 뚜렷했다. 이곳 잠원 한강공원은 피크닉 장소를 따로 정해놨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친구 단위로 여기저기 앉아서 수다를 떠는 듯이 보이고, 젊은 아빠들은 자기 애들과 연을 날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열심히 아빠 노릇으로 소중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군데군데 쌍쌍이 앉은 사람들이 정말 피크닉 가방에 음식을 담아서, 일부는 와인인지 샴페인인지 마시며 제법 영화의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딱, 아쉬운 바람만 빼고. 바람이 심해도 정말 심했다.
우리 일행?? 오, 제법 근사했다. 피크닉 의자와 책상에 먹을 것까지. 그런데 하이라이트는 턴테이블이다. 거기에 LP 판까지. 복고? 뉴트로? 취미는 돌고도나 보다. 실외라서 음질이 얼마나 좋은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음악, 레코드판 주인공은 가수 크러쉬였다. 크러쉬가 누구냐고?? 흠.......... 내 탓은 아니고 알아서 찾아보시라. 크러쉬 음악이 턴테이블에서 흐르고, 바람 소리 때문인지 바깥이라서 그런지 지지지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냥 그 모양이 좋다. 턴테이블 그 자체가 정말 복고다. 누가 LP로 음악을? 그러고 보니 요즘 사람들은 노래를 어떻게 듣지? 뭐, 음질이 뭐가 중요하던가. 지금은 정말 혼성의 시대인가 보다. 과거와 현재, 젊음과 나이 듦, 복고와 트렌디의 혼합. 하이드리드. 유전적으로 하이브리드가 강하다던데.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주인공은 한강이다. 바람으로 강물결이 생겼는데 그 물결에 태양이 반사되어 물고기 비늘처럼 빛난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겠지?? 갑자기 웬 비약. 아직 아니다. 아직 아니란 말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듯이 예전의 한강이 오늘의 한강과 같지만, 예전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를 수 없으니 그 사이 몸과 마음에 베인 그 풍취가 어디로 가겠는가. 바람이 시달리는 나무들이 그래도 희망을 상징하듯 녹색을 머금고 있다. 아주 짙은 색이 아니라 이럴 때 쓸 수 있는 표현이 한참 '물먹어 가는' 이 적당할 것 같다.
오늘 피크닉 나온 멤버들을 잘 모른다. 그저 이름 정도. 그래도 이런저런 대화가 되니 다행이다. 아니, 그들이 껴준 것인가. 그저 그들의 젊음과 바람과 봄날 푸르름이 좋다. 잠시, 여기서 시간이 멈췄으면 한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랬으면 하는 바람으로 오늘 이 시간을 즐긴다. 그저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대화보다 색다른 남다른 사람들과의 모임이라. 대화가 가능하니 흠, 난 젊구나. 젊어. 이렇게 봄날 하루가 간다. 뭔가 시간이 길어진 듯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한강뿐만 아니라 이들도 오늘의 주인공이다. 멋지고 아름다운 청춘, 봄, 봄이다. 봄 봄.
https://www.youtube.com/watch?v=450p7goxZqg&ab_channel=johnlegendVEV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