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버크 데보레이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2025). 액스. 오픈하우스.

by 길문

기다려라. 힘들고 지치더라도. 곧 그가 우리를 구하러 오리라. 어라, 시간이 지나니 이름을 바꿨다. 네드 러드로 말이다. 원래 이름은 로빈 후드였던 것 같은데 언제 바꿨지? 그 의적이 설쳐도 세상이 바뀌지 않았나 보지? 그러니 그는 시간 따라 자연스레 잊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때가 1800년대 초라고 알려진, 영국에서 증기기관과 방직기계가 도입된 해라고 했는데, 이번엔 네드 러드가 나타났다.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기계가 가져가고, 열심히 일해 숙련공이 된 이들까지 밥 먹고 살기 힘들게 만들었느니, 그가 명했다. 사람을 대신한 기계를 파괴하라고.


어차피 시간은 흐르는 거라서 흐르고 흘러 1990년대가 되었다. 이번엔 버크 데보레가 나타났다. 세상을 구원까지는 아니고,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나타난 것이다. 옛날에는 대의명분이 중요해서 그걸 내세웠는데, 그사이 먹고살기 피폐해지니 누구도 구원을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사적구제에 나섰다. 남들이 어떻게 되든 나만이 우리 가족만이 중요한 세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로빈 후드야 세상이 건네는 동화 같았다면, 네드 러드는 기계를 파괴해서 노동자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명분이 사회적이었다면, 개인화되고 복잡해진 세상으로 인해 남이 떠들어도 나만 잘 되는 세상으로 바뀐 거라서 버크 데보레는 사적 구제에 나선 거다. 아, 명분은 있긴 있다. 우리 가족 먹고살아야 하니,


계획이 성공해야 한다. 속히 어려움에 벗어나야 한다. 그러니 별수 있나? 혼자서 해결하자니 벅차고 힘들지만 편하기도 하다. 나만 알고, 남이 모르게 하면 되지 않던가. 그래서 시작한 것이다. 살인 말이다. 지금까지 뭘 죽여본 적 없다고? 거짓말 마시게. 파리며, 모기며, 바퀴벌레며. 아님, 내가 아닌 남이 죽인 돼지며, 소며, 닭이며, 기타 등등. 그렇다고 사람까지 먹는 걸 받아들인 것 아니라는 건 알아주시게나. 이건 나만 잘되면 되는 거라서, 거창하게 의적이란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고, 거창하게 무슨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 따위로 역사가들이 주절거릴 필요도 없으니.


이름을 말해도 될 것 같다. 그래야 내 말을 더 믿으니. 이름은 버크 데보레이다. 남들이 나를 중산층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고 있다. 먹고사는데 어려움 없고 가족들에게 무능한 아버지로 낙인찍히지 않았다. 아내 또한 잠시 바람 나서 떠돌았지만, 그건 어느 순간 무능해져서 그런 것이니 까짓것 통근 내게 이해하고 넘어가자. 마음에 걸리는 건 아들놈이 커가는데 지원이 줄자, 끊긴 건가? 글쎄, 이놈이 사준 컴퓨터로 배우느라 소프트웨어 등을 몰래 훔쳐 왔는데 그게 경찰에게 걸렸다. 그런데, 내가 누구던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데 아들 하나 구제 못할까? 그러니 깔끔하게 아들 죄를 세탁해 줬다. 이건 아버지라서 그런 거다. 욕하지 마시라. 더한 일이라도 너의 아들을 위해 당신도 무슨 일을 할 테니 말이다.


난 23년간 평범하지만 성실하게 일해온 사람이다. 제지회사에서 말이다. 날벼락같이 정리해고를 당했으나, 내 경력이라면 금방 재취업에 성공해 굳이 남들도 겪는 해고라는 아픔을 쉽게 이겨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2년이나 흘렸다. 여기서 난 깨달았다. 나만 잘되면 되니까, 나만 재취업에 성공하면 되니까. 그걸 위해 나만큼 정도 경력자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나를 선택하게 하면 되지 않던가. 이처럼 쉬운 생각이 어딨던가? 생각은 쉬운데, 방법은 그들을 제거하는 거라서. 망설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마음먹기 어려워서 그렇지 마음먹으면 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을까?


방법은 생각해 보니 간단했다. 언젠가 어느 회사에선 한 명 정도 경력자를 뽑을 테고 그동안 나만 간택되도록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누가 내 경쟁자인 줄 모르니 그 경쟁자를 찾도록 했다. 그걸 어떻게? 가짜로 제지회사를 만들고 그 회사에서 경력자를 뽑는다고 구인 광고를 내면, 누군가 지원을 할 테고, 모르는 그 누군가가 나의 잠재적 경쟁자가 될 테니 그들을 속아내서 그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 그들이 언젠가 뽑는 제지회사에 같은 경쟁자가 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니, 그들이 구인광고에 응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되는 거고. 그래서였다. 내가 누군가를 제거하기 시작한 것. 그들이 내 경쟁자니까. 방법은 총을 쏘건, 질식사를 시키건, 차로 깔아뭉개건, 머리를 그냥 날려버리건.


그렇게 노력하니 조만간 희망이 보인다.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형사까지 행운을 빌어주었으니, 이제 난 어엿한 가장으로 중산층 사나이로 돌아갈 것이다. 기대하지 마시라. 난 로빈 후드도 아니고, 네드 러드도 아니라 난 그냥 버크 데보레일 뿐이다. 그러니 부탁을 드려야겠다. 이제 더 이상 내게 관심을 꺼주시라. 정말, 부탁이다. 나도 당신 모두에게 행운을 빌어주겠다. 당신이 뭘 하든, 당신이 뭘 원하든, 반드시 이뤄지도록 말이다.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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