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2025).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웅진지식하우스
전쟁은 미친 짓이다. 과거가 준 교훈이다. 겪어본 이는 안다. 주변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아도 꼭 모르는 건 아니지 않을까? 무관심일 수 있을 텐데, 우린 그렇게 산다. 나와 직접 관련이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전쟁이 벌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강 건너 달구경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 옆에서 사라질 텐데, 아님 내가. 그러니 전쟁을 경험했다는 건 살아남았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라지지 않은 그들에겐 다행이겠으나, 그렇게 남은 기억과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남아, 그래도 그건 산자에게 남는 거라서. 살아남은 박완서는 치열했던 삼 년을 어떻게 기억할까?
전쟁터에서 선을 넘는 건 목숨을 건 도박이다. 그러니 줄을 서야 하는데, 공산 치하이거나 아니나 선택지가 없다. 카멜레온이면 어떤가? 살기 위해 빌붙어있는데 북으로 가라고 한다. 무슨 사상 때문에 인민위원회 일을 했을까? 오빠는 다리에 총상을 입어 서울을 떠날 수 없었는데, 떠나지 않은 것으로 믿도록 해야 한다. 북에서 남으로 밀고 내려올 때 남으로 밀려가지 않음은 생사의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전선에서 밀리나 보다. 용도가 애매한 늙은이와 병자는 남고, 젊은 사람들을 가려서 올려 보내려 한다. 그러니 선택된 걸 좋아해야 할까?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갈 사람과 남을 사람도 선을 그은 자들이 결정을 하니. 올케와 난 북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들이 결정한 거라서.
이번엔 다시 북에서 밀고 내려온다. 남에서 북으로 밀고 올라갈 때(1.4 후퇴) 남이 개입해서 끝까지 가지 못했으니, 다시 밀린 건데 이번에도 역시 줄을 서야 한다. 오빠는 서울에 남은 전력으로 이번에 내려가야 한다. 의심받는 사상을 세탁하는 방법이다. 지난번 남음으로써 북으로부터 우호적일 수 있었다면, 이번엔 남음으로써 남으로부터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의혹의 눈초리를 불식시켜야 한다. 갔다 다시 오면 난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오빠는 그렇다 치고 내가 향토방위대가 된 것도 넘지 않아야 할 선을 지킨 것이다. 가방끈이 길은 이유로 인민위원회와 향토방위대란 방어막이 생긴 거지만. 난 마모되고 싶지 않다. 어느 쪽이든.
지난번 내게 마련된 차를 탔으면 임진강을 넘었을 것이다. 엄마가 어떻게든 임진강을 건너지 말란 말을 들은 것이다. 그러다 북으로 가는 척하다 빠진 곳이 파주 방면이었다. 햇살 도타운 그날 마을을 지나다 장독대 옆에 꽃망울이 부푼 백목련을 보았다. 순간 착각을 했다. 개화가 멀었는데 개화했다고 감정 이입을 해버렸다. 그래서 나온 말 "어머, 얘가 미쳤나 봐." 인간이 저지른 참혹한 세상이 꽃을 피우다니. "그러니 인간이 저지른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
이번엔 한강을 넘어야 한다. 임진강을 넘었으면 다시 가족을 볼 수 없었겠지만, 한강을 넘는 건 가족도 넘는 거라서 어떻게든 살아 다시 봐야 한다. 더해 향토방위 대원으로 넘는 거라서 다르긴 했지만, 수원에서 온양으로 가는 동안 서로 흩어져 제 갈 길을 갔다. 그렇게 남은 난 다시 서울로 가야만 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기에. 서울 집엔 여전히 숙부와 숙모만 있었다. 천안으로 피난 간 가족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 후 돌아온 가족. 그러다 오빠가 죽었다. 죽은 지 하루 만에 매장하고 돌아온 날 숙모는 팥죽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상 치른 날 밥 이 당겼을까? 그때 숙모가 말했다. 쉬어서 버리게 될 텐데......"쉬어서 버리면 안 되지." 엄마 말에 사랑하는 오빠가 죽은 지 하루도 안돼 썩을까 봐 묻은 가족들이 모여 "팥죽이 단지 쉴까 봐 아귀아귀 먹기 시작했다."
소설은 어디까지 허구일까? 읽다 보니 작가의 삶이 온전히 드러난 것 같아 그가 정말 이렇게 살았지 싶다. 소설 속 초상화를 그리는 등장인물 박수근이 진짜 화가 박수근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1951년에서 1953년에 이르는 소설 속 배경이 온전히 그땐 그랬다고 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련하다. 총탄이 난무하고 폭탄이 여기저기 터지는 최전선에서의 삶은 단테의 신곡이 아니라도 지옥일 텐데, 전쟁이 드리운 그늘 밑은 여전히 서늘해서 천국이 아니라면 연옥일까? 북한이 넘어와 지배할 땐 인민위원회, 시민증, 보급투쟁, 인민군과 같은 단어가 난발하다, 겨우 돌아오니 싸진 캐넌, 티나 킴, 양색시, 양키, 양공주, 피엑스 걸, 달러 장수, 양아치라는 단어가 나뒹굴었다......
누군가 보낸 미치도록 젊었던 그 스물한 살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