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써 내려간 글.
지금 여기, 서울의 밤공기는 정겹다. 매일 밤, 그다지 까맣지 않은 색채 위에 내 방 창문으로 뵈는 교회당 위 십자가의 붉은색과 옆 병원 십자가의 진녹색, 가지가 유난히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뒤에 달빛같이 환하게 발하고 있는 가로등은, 높은 건물에 가려진 달빛을 대신해 쓸쓸하고도 정겨운 벗이 되어주었다.
고층건물에 보름달이 반쯤 가려져 마치 달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때면, 연노랑빛 반쪽은 너무나 소중하게 반짝반짝 빛난다.
집 앞에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중국음식점들의 옆을 지나갈 때면 마라샹궈(麻辣香锅)의 매운 향이 코 끝을 찌르며, 지옌빙(煎饼)이 구워지는 고소한 기름냄새는 마치 커피향이 커피의 맛보다 더 매혹적이고 달콤한 것처럼 나의 후각을 유혹한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날에도 어김없이 창문 사이로 바람이 고맙게도 솔솔 날숨을 불어주면 나는 더위를 피한 본능에 이끌려 창문에 걸터앉아 서울의 정겨운 밤공기를 마신다. 들이쉬고 내쉬며, 맞은편 집 창문들마저도 다 불이꺼진 늦은밤에도 여전히 하루 일과가 끝나지 않은, 혹은 이제야 하루종일 참았던 숨을 내쉬며 퇴근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이렇듯 나에겐 완벽하게 익숙한, 나의 생활력과 사고양식이 미치는 반경이, 사흘 뒤 바다 건너 청도(青岛)에서 완전히 다른 언어를 만나고 타지인과 부딪히고, 다시 새롭게 나의 생활력을 찾아가는 과정이 정말 신선하게 나에게 밀려올 것이란 설렘과 수심(愁心)에 심장이 옴짝달싹 못하다. 그리고 새로운 땅을 향한 이륙에 대한 낭만주의에 빠져, 출국 사흘전인 지금 당장 할 일에 대해 안일해지고 나태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새롭게 발을 들여놓을 그 곳도 이 곳과 다름없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각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삶의 터전일텐데, 아마 출국 직전까지 안일한 낭만주의에 빠진 채 새로운 대륙을 맞이할 것만 같다.
얼마 전 피곤함에 지쳐 다래끼가 나서 먹었던 항생제가 버티고 또 계속 버텨 왔던 내 안의 행복바이러스까지 모조리 다 소염시켜버린듯 했는데, 두근두근, 콩닥콩닥, 정말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기분좋은 긴장감에 이런 내 자신이 그다지 혐오스럽지만은 않다. 이 부당한 나태함이 서울의 밤공기처럼 새로운 땅에서의 삶에 의지를 불어넣어주는 고마운 그 무엇이기를 바란다.
어김없이 선선한 밤의 색채 위에서 5.4광장에서의 여름 야경을 떠올리며 또 의도치 않게 부당한 나태함을 즐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