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숫대야에 세수를 하겠다고 물을 받아놓고 잠깐 급한 일이 있어 나간 새에 물이 슬슬 차가워진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보니 벌써 겨울이 지나 있다. 이미 그 물로 세수를 할 수도 없다. 빛바랜 세숫대야는 덩그러니 놓여 있고, 난 그 위로 비친 나의 긴 얼굴을 바라본다. 내가 잊고 나온 세숫대야의 차가운 물이 내 몸 안 발가락에서부터 채워져 있어 무척 시리다. 눈물샘도 막혀버려 나의 어딘가에서 도무지 이 차가운 물을 빼낼 수가 없다.
언제부턴가 하루를 마치고 석양의 전망대 위에서 나를 내다보았을 때 더 이상 희망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마음 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한가운데가 도려져 아무것도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에 대한 희망을 살해당하고 난 뒤에 더 이상 알록달록한 단어들이 생각나지 않는 걸까.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유리 조각들이 있다. 내 혈관 안에서 긴 시간 표류하다 결국 동화되지 못하고 피부를 뚫고 안에 박힌다. 밤과 고요가 흩뿌려질 때면 나의 피부 속에서 살살 움직이며 상처 난 부위를 다시 할퀸다. 내가 겪은 수많은 습도와 추위는 아직 나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틋하다, 각자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삶의 태가. 날이 추워지고 차갑고 비릿한 겨울 공기가 내 폐 안에 들어온다. 나뭇가지가 얼어가는 와중에도 삶에 대한 의지가 느껴지는 그 모습들이 따뜻하다. 나의 미움 또한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