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자도 문제 없어
처음엔 합성 사진인줄 알았다. 주택가 골목 귀퉁이에서 오토바이 배달원과 마주 서 있는 얼룩말이라니. 도심 속 차도 사이를 달리고 있는 얼룩말이라니!
지난달(2023년 3월) 서울어린이대공원 동물원을 탈출해 화제가 되었던 얼룩말 세로는 내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한동안 나는 세로를 자주 생각하며 지냈다. 아니, 부러 생각했다기보다 그냥 문득문득 떠올랐다. 동물원 목재 울타리를 부수고 뛰쳐나오자마자 세로가 마주했을 그 모든 풍경은 얼마나 이상했을까.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가로수와 빌딩, 가게와 상점들, 자신을 보고 놀라 달아나거나 핸드폰을 들이미는 사람들. 우리에겐 익숙한 일상 속 장면들이 세로에겐 낯설기만 했을 거다.
세로가 3시간만에 생포되어 동물원으로 다시 돌아가게 됐을 때, 사람들은 안심했다. 안전히 집으로 귀가했다고 기뻐했다. 그런데, 그게 대체 왜 기쁘지? 이제 얼룩말의 발길에 걷어 차일 염려 없이 울타리 너머 안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됐기 때문에? 그나저나, 세로의 집이 왜 동물원이라는 거지?
그러고 보니 내가 얼룩말을 처음 본 장소도 동물원이었다. 다섯 살 무렵이었는데, 그때 태어나서 처음 얼룩말을 직접 보았다. 동물원에 다녀온 그날 밤, 나는 얼룩말을 떠올리며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 모나미 팬으로 팔과 다리 전체에 일정한 간격으로 둥글게 무늬를 그렸다. 아니, 그렸다고 한다. (사실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다. 엄마는 그날 나를 목욕시키느라 혼이 나셨단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펜으로 열심히 무늬를 그리던 순간이 짧은 영상처럼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도 같다. 다만 내가 어떤 생각으로,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이것 하나뿐. 그건 바로 내가 그날 얼룩말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한동안 얼룩말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몇 년 뒤, <동물의 왕국>에서 우연히 아프리카 초원에 서 있는 얼룩말을 보았다. TV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날 나는 다시 한번 이 동물에 매혹되었다. 정말이지 놀라웠다. 생긴 건 말이랑 거의 똑같이 생겼건만, 어떻게 온몸에 저런 무늬가 새겨져 있는 걸까. 그것도 페인트칠이라도 한 것처럼 선명하게!
내겐 신비롭기 그지 없는 이 얼룩말은 아프리카 초원에 가면 한낱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그곳은 동물원과 달리 철저한 야생이다. 사자와 표범, 하이에나, 악어 등 얼룩말을 노리는 동물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그래서 얼룩말은 매 순간 긴장해야 한다. 그들에게 슬금슬금 다가오는 포식자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늘 뛸 준비를 해야 한다.
얼룩말이 서서 자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인간은 졸리면 눕거나 앉을 곳, 엎드리거나 몸을 웅크릴 곳을 찾지만, 얼룩말은 그러지 않는다. 그냥 네 다리로 서서 잠깐 눈을 붙인다.
얼룩말의 관절에는 잠김 장치가 있다. 그들은 잠이 드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무릎 관절을 잠근다. 그래서 잠이 들어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얼룩말처럼 관절에 잠김 장치가 있는 기린이나 말 같은 발굽 동물들은 다 서서 잘 수 있다.)
하루에 7시간가량 자는 얼룩말은 낮 동안엔 서서 짧게 여러 번 토막잠을 자고, 밤에는 바닥에 옆으로 누워 잔다. 특히 몸과 뇌의 회복 과정을 돕는 렘수면(REM)과 깊은 수면 단계에 도달하려면 달아날 준비를 하느라 긴장하지 않고 편히 자는 시간이 필요하다.
야생에서 얼룩말은 크게 한 무리를 이루었을 때만 잔다. 서로 망을 봐줄 수 있는 환경일 때 돌아가면서 자는 것이다. 얼룩말 사진을 찾다 보면 서로 마주본 방향으로 상대방 등에 머리를 기대어 쉬는 모습이 많은데, 동물학자들은 이 또한 포식자들을 경계하기 위해 360도 주변 뷰를 보기 위해서라고 추측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얼룩말에겐 동물원이 더 안전한 게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얼룩말 입장에선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다. 얼룩말은 말과는 달리 지금껏 사육 가축으로 진화해오지 않았다. 등에 사람이 올라타는 것은 물론, 짐을 싣거나 안장을 걸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몸체가 말보다 작은 탓도 있었지만 일단 성미부터 고약하다. 궁지에 몰리면 쉽게 동요하고 난폭해지며, 사람이 올라 타려고 하면 물어뜯고 발로 차는 등 방어 태세를 취한다. 얼룩말에 대해 누군가가 남긴 다음 멘트가 왠지 모르게 와닿는다.
얼룩말은 너가 등 뒤에 타려 하면 너를 죽일 것이다.
말처럼 생겼다고 다 말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If you tried to ride one, it would kill you.
Just because they look like horses, doesn’t mean they have to act like one.
물론 얼룩말을 길들이려 시도한 사례들이 없진 않다. 안장을 얹혀 고삐를 채운 뒤 펜스를 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19세기 중반엔 조지 그레이(George Grey)라는 사람이 남미에서 얼룩말을 뉴질랜드로 수입해와 그의 마차를 끌도록 훈련시켰다. 빅토리아 시대에도 동물학자 월터 로스차일드(Walter Rothschild)가 조지 그레이와 같은 시도를 했다. 그는 얼룩말이 이끄는 마차를 끌고 버킹엄 궁전까지 행진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례는 해프닝으로 그쳤을 뿐, 얼룩말은 여태껏 사육되지 않았다.
탈출 소동을 벌인 세로를 두고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세로는 아빠 얼룩말 가로가 죽은 뒤 혼자 외로워했고, 스트레스가 많아 옆 우리의 캥거루와 싸우기 일쑤였으며, 어느 날 그 모든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시도한 거라고들 말했다. 세로가 있을 곳은 애초에 동물원이 아니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으나 몇몇 공감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앞선 얘기들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인간이 상상하는 이야기는 역시, 지극히 인간중심적일 때가 많다. 정말이지 나는 세로에게 묻고 싶다. 그의 진짜 심정을.
* 참고 자료
- <Can Zebras be domesticated?>, Library of Congress, 19 Nov 2019, www.loc.gov
- <5 fascinating Facts about Zebras>, World Animal Protection, 13 Feb 2023, www.worldanimalprotection.us
- <10 things you didn't know about zebras>, London Zoo, Jan 31 2020, www.londonzoo.org
- <Wild Horses Can't be broken: Zebra Domestication Attempts>, Thomson Safaris, www.thomsonsafar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