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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우킴 Dec 09. 2020

남편은 매일 혼자 점심을 먹었다

남편은 1인 사무소에서 일했다. 소소한 일부터 큰일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도맡아 해야 했다. 매일 한국에 있는 본사와 협업을 해야 했고 본사의 업무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야 마음 놓고 퇴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의 시차를 고려하면 남편이 일하는 동안 빌딩 내 전등은 이미 꺼진 후였고, 겨울에는 난방이 잘 안되어 추위에 덜덜 떨며 본사의 업무지시가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업무를 무사히 마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컴컴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오후 4-5시에 퇴근하는 현지 회사원과 달리 워라밸이라고는 눈 씻고 찾을 수 없는 이곳이 한국인지 뉴질랜드인지 남편도 혼란스러웠을 테다. 퇴근 후 술 한잔 기울이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나 나눌 말벗이라도 있었으면 회사 생활이 그나마 나았을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상점과 식당이 일찍이 문을 닫는 뉴질랜드에서 소소함 즐거움을 찾는 일이란 하늘의 별따기였을 것이다. 어느 날 남편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출장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나 또 출장 가야 해. "

"또? 이번에는 며칠 동안 가는 거야?"

"3박 4일."

"3박 4일? 당신 없을 때 아이들이 갑자기 아프면 어떡해? 아이들 데리고 운전하다가 만약 차 사고라도 나면 어디에 전화해야 하지? 당신 출장 갈 때 갑자기 연락이 끊기면 어떡해?"

"별일 없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남편이 출장이라도 다녀온다고 할 때면 지레 겁을 먹고는 미리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침착한 남편은 느긋한 말투로 나를 타이르고 계획대로 출장을 떠났다.


남편이 없으면 집 안은 유난히 더 써늘하고 추웠다.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부는 우기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현관문이 세차게 흔들리곤 했는데, 낡은 현관문 경첩에서 나는 끽끽 소리가 공포심을 유발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깊은 밤 어둑한 집 안에 아이들과 홀로 남아있을 때는 정말이지 무서웠다. 아이들에게 강한 엄마의 모습을 보이리라 다짐했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고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내가 매일 육아와 살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편밖에 없었다. 주변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 전화해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았다.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면 그동안 혼자 아이들 보느라 힘들었다고 하소연하기도 했고, 감정의 응어리를 풀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도 남모를 고충이 있었을 터. 남편의 감정과 내 감정이 부딪히면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속상하고 화가 나서 집 밖을 나서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지만, 갈 데가 없었다. 밖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 가로등 불빛조차 잘 보이지 않는데 그 어둠 속을 뚫고 갈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속상한 마음을 꾹꾹 눌렀다. 아마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힘든 것만 생각하면 끝이 없었다. 남편도 회사에서 주재원 발령으로 한국을 떠난 거였고, 나도 남편을 따라 함께 온 것뿐이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기도 했고, 남편을 기러기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더더구나 없었다. 힘들어도 같이 힘들고, 고생해도 같이 고생해야 가족이 아니냐라는 마인드로 따라왔지만, 어쩌다 갑자기 훅하고 밀려오는 서글픈 감정을 달랠 방법은 딱히 없었다.


역지사지로 남편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성실하게 일해주는 남편의 모습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1인 사무소에서 외로움과 맞서 싸우며 꿋꿋하게 버텨 주었고, 남 모를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 혹은 폭식으로 풀지 않아서 무척 고마웠다. 갑자기 아이들이 크게 다치거나 작은 사고라도 나면, 불안에 떨고 있는 나를 위해 하버 브리지를 건너 단걸음에 와주던 남편이었다. 남편의 힘듦과 노력에 초점을 맞추니 어느새 나의 문제는 크게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매일 남편이 회사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게 짠하게 느껴졌다. 한국처럼 회사에 구내식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값싸고 맛난 국밥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느끼한 햄버거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먹다 보면 정말 질린다. 언제 한번 정성을 다하여 이쁜 도시락을 싸 보리라 다짐하고 SNS를 둘러보았다. 알록달록하고 맛깔스러운 반찬부터 간식까지,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이 정말 많았다. 남편도 분명 좋아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저질 체력이었던 나는 아침에 두 아이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등교 전에 아이들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를 쓰다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도시락은 고사하고 남편이 먹을 아침 식사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눈치 빠른 남편은 아이들 도시락을 싸고 남은 걸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는 출근 준비에 나섰다.


“오늘 점심에 약속 있어?”

"오늘? 아니. 아무것도 없는데?"

"그럼 점심때 사무실 근처로 올래? 같이 점심 먹을까?”

"그럴까? 그럼 아이들 보내고 집 정리 좀 하고 갈게. 같이 점심 먹자."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며 종종 나에게 점심을 같이 먹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 도시락도 못 싸주는데 점심은 당연히 함께 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각자 바쁜 일상을 살아가느라 대화가 종종 단절되곤 했지만, 가끔 남이 해주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땐 20대 연애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타지에 살면서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더없이 필요한 정신적 동지가 되어 주었다. 아니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지냈어야 했다. 머나먼 남태평양 섬에서 의지할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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