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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우킴 Dec 21. 2020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이들이 영어를 잘 못 했을 때는 모국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집에서는 남편도 나도 모두 한국어를 쓰고 있었고, 아이들에게도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서툰 영어는 시간이 지나면 차차 좋아지겠거니 했다. 그저 아이들이 스트레스받지 않고 새로운 환경에서 잘 적응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아이들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생각보다 빠르게 영어를 습득하기 시작했다. 매일 학교에서 영어를 듣고 읽고 쓰다가 집에 오면 남매는 영어로 대화하기도 했다. 어느 날 첫째가 거실 테이블에서 색칠 공부를 하다가 나에게 달려와 물었다.


"엄마, Brown이 무슨 색이야?"

"Brown? 브라운은 갈색이지."

"그럼 Green은 무슨 색이야?

"Green은 초록색이야."


아이의 질문에 답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이가 새롭게 배운 영어 단어의 수는 점점 많아지고 있었지만, 한글은 아니었다. 왠지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모국어를 금세 잊어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주재 생활을 마친 후 한국에 돌아갔는데 한국어를 잘 모른다면? 분명 더 골치 아픈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아이들이 모국어를 접할 기회가 집 밖에 없었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 모든 환경이 영어로 둘러싸여 있으니 집에서는 무조건 한국어를 쓰자고 제안했다. 이중언어를 균형 있게 쓰자는 의도였다.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잘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영어를 습득하는 속도가 한국어를 습득하는 속도보다 더 빨랐고, 급기야 아이들은 한국어를 쓰다가 단어의 뜻을 몰라 중간중간에 영어 단어를 종종 섞어 쓰는 것이 아닌가. 말로만 듣던 이중언어의 부작용이었다.


집 말고도 한국어에 대한 자극을 더 줄 수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오클랜드에 한글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한글학교에서는 단계별로 한국어를 학습할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한글은 물론 한국의 전통문화도 함께 배웠다. 추석이 되면 다 함께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송편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뉴질랜드 땅 한가운데서 아이들이 다 함께 손을 잡고 강강술래 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왠지 모를 뭉클함이 차올랐다. 타지에서 한국인의 뿌리를 심어주고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여러 방면에서 노력하고 수고하는 선생님들의 손길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


난 아이들이 모국어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자 그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통로다. 민족 간에 유대감을 느끼고 한국인이 한국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건 우리 고유의 언어 한글이 있어서가 아닐까.


뉴질랜드 어디를 가도 'Hello' 대신 'Kia Ora'라는 마오리어 인사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문신이 가득한 얼굴과 몸으로 하카(haka) 춤을 추는 마오리족을 만날 수 있다. 하카 춤은 마오리족 선조로부터 내려온 이들만의 자랑스러운 전통춤이다. 마오리어는 영어와 함께 뉴질랜드 공용어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뉴질랜드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는 마오리족이 그들만의 언어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다.


마오리족이 백인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그들만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언어와 전통문화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비단 마오리족 뿐만 아니라 중국인, 인도인 등 뉴질랜드에 정착한 다양한 민족들도 그들만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지닌 채 다문화 국가를 만들며 살고 있다.


영어를 잘한다면 국제사회에서 무궁무진한 기회를 마주할 수 있겠지만, 모국어에 대한 이해와 애정 없이는 자신의 뿌리를 정의할 때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타지 생활을 하면서 그 무엇보다 소중한 모국어를 지키고 싶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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