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교사를 선택한 이유는 다양할 수 있지만 '안정적이니깐' 의 이유가 1순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안정성도 중요하지만 교사는 소명의식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
사람을 만나는 직업 이상의, 한 사람이 존재를 완성해 가는 중요한 여정에 영향을 주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1년 동안, 한 반의 담임을 하면서 학년이 끝날 때 즈음, 내가 자주 쓰는 말이 아이들의 말에 묻어나는 걸 목격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샘, ~해도 되나요? 괜찮나요?”
라고 물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답하는 말은
“안되는 게 어디있어요. 되도록 만들거나 하면 돼죠.”
이다.
그리고, 반 아이들이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안되는 게 어딨어, 해봐.” 라는 말을 학년이 끝날 때 쯤 종종 듣게 된다. 이것이 나의 영향인지 100% 확신할수는 없지만 내가 자주 사용했던 언어 표현들이 교실에서 들릴 때는 더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교육의 영향이나 효과는 단시간에 보이지 않는다. 언제 어떻게 발현될 수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 교사의 행동과 말과 태도가 스며든다는 점이다. 이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수도 있다.
교사는 일종의 예술가이다. 수업은 물론 아이들과의 만남 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창의성을 더해 디자인하고, 실제로 표현하고, 감동을 주어야 한다. 매일매일이 성장의 시간이고, 또한 모두의 지문이 다르듯 한 명 한 명이 다른 아이들에게 정형화된 하나의 교육은 효과를 내기 어렵다. 그렇기에 경제적 ‘수단’의 접근 이상의 일종의 사명 혹은 교육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자신의 교육철학이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주고 받는 것이 아닌, 내리사랑이다. 종종 “아이들은 해줘도 몰라”, “자기네가 잘나서 잘된 줄 알아” 라는 푸념의 말을 동료 교사로 부터 듣는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부모가 주는 사랑을 아이들이 매순간 인지하지 못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 내가 주는 만큼 기대가 생기는 순간 선이 그어지고 주고 받는 계산 속에 상대를 대한다.
아이들이 오직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교사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교사의 역할 중 하나이다.
교사는 공부해야 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서도, 학습의 대해서도,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자신과 교육, 학교의 역할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학습과 성찰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직업이다. 기존의 해오던 관행과 같은 방식의 교육만의 고수는 도태의 길에 들어서는 지름길이다. 나도 안다. 변화와 성장이 쉽지는 않다는 것.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에 교사 계속 성장해야 한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하는 말들이 어떠한 교사들에게는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도 안다. ‘뭘 그렇게 까지 해야돼?’ 라거나 ‘너만 교사냐’ 등등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 중요하고 큰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
어습득 이론 중 결정적시기 이론이 있다. 첫 언어를 배우는 시기는 10세 미만 이어야 하며 이 시기가 지나면 언어 습득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1800년대 프랑스에서 발견된 12세 정도로 보이는 일명 늑대소년이라 불린 ‘야생 소년 빅터’는 몇 년 간의 언어를 가르치려는 노력에도 겨우 ‘oh, dude’와 같은 짧은 두 세마디의 말 밖에 배우지 못했 다.
다른 예들을 더 더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다. 십대는 인지적, 정서적, 감정적으로 크게 변화하는 결정적 시기에 있음을. 그렇기에 어느 환경에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 누구와 관계를 맺고 어떠한 말을 듣고, 어떤 경험을 하는가.
집에서 충분한 돌봄이 되지 않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학교가, 교사가 부족함을 채워줘야 한다.
그렇기에 교사는 쉽지 않은 직업이다. 상처 받는 직업이다. 그럼에도 성장해야 하는 직업이다. 교사의 성장과 지속을 위한 충분한 지원도 따라서 필요하다. 과연 우리나라의 교육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