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태도로 하루를 살까?
병원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70대로 보이시는 할아버지가 말을 거셨다.
“내가 눈이 잘 안 보이는데 80번이 오면 말 좀 해줄 수 있겠어?”
“네”
“방금 전에도 한대를 놓친 것 같아.”
“네, 말씀드릴게요.”
마침 내가 타는 버스도 같은 버스였고, 나 역시 이곳이 초행길이라 어플을 통해 버스가 언제 오는지 보고 있었다. 버스 노선이 보여주는 버스들의 이동을 보니 할아버지 말씀대로 방금 전 버스 한 대가 지나간 것 같았다.
평소라면 거기서 생각이 그쳤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 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잘 안보이시는구나, 얼마나 답답하실까?’
버스를 타야 하는데, 버스 번호가 잘 보이지 않는다면, 불안과 답답함이 함께 느껴질 것 같았다.
요즘은 대부분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가 곧 도착합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나온다.
그런데 최근 바뀐 것이 하나 있다.
이전에는 한 정거장 전에 버스가 있을 때 안내 메시지가 나왔는데 요즘은 3 정거장 전에 있는 버스부터 곧 도착 안내가 나온다.
5분 정도 흘렀을까?
‘80번 버스가 곧 도착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하지만 3 정거장 전에 버스가 있었기 때문에 오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음성안내를 들으신 할아버지께서는 조금 초조해진 표정이셨다. 그리고 버스가 올 때까지 계속 서서 기다리셨다.
조금 더 친절히 말씀드릴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할아버지, 저도 같은 버스를 타니깐 여기 자리에 앉아계시면 알려드릴게요.’
라고 말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번호가 다른 버스가 앞에 서자 할아버지께서 이 버스인지 물으셨다.
“아니요, 저거 아니에요. 저도 같은 버스를 타니깐 오면 알려드릴게요.”
몇 분 후, 버스가 왔고
"이거 타시면 돼요"라고 말씀드렸다.
버스에 올라타시면서도 버스카드를 찍는 위치를 찾을 때 그리고 자리를 앉으실 때 조금 주춤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니 다시 마음이 쓰였다.
‘불안하시겠다, 저분에게 안 보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인간은 감각의 70%~80%를 ‘시각’에 의존한다.
평소에 당연하듯이 여기던 신체 일부가 아프면 그 부위가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진다.
잔병치레가 많지는 않지만, 이리저리 넘어지고 다쳐서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집처럼 드나들고 있다.
8년 전 계단에서 굴러 다친 무릎은 등산을 하거나 오래 걸으면 여전히 욱신대고,
3년 전 여름에 다친 발목 인대, 정확히 말하면 2군데가 완전 파열이 되었다. 그리고 그 통증은 지금도 매일매일 계속되고 있어 주기적으로 한의원에 다닌다.
몇 년 전에는 홈트를 하다가 잘못된 자세 때문에 팔, 골반의 통증으로 1년간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다니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고,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모든 감각기관 역시 살아있다.
내가 지금 가능한 부분에 좀 더 감사를 느끼고 초점을 맞추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때 학교에 공부하러 가지 않았더라면 계단에서 구르지 않았을 텐데.’
‘무거운 책상을 나르려고 애쓰지 않았으면 발목 인대가 멀쩡했을 텐데’
‘그때 욕심내서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다치지 않았을 텐데’
라는 후회의 생각들로 머릿속을 채울 것인가?
짧은 순간의 만남과 대화는 내게 여러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보인다는 것이 줄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그리고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
오늘, 어떻게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