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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May 13. 2023

아들, 딸은 있지만 남편은 없어요

그러고 보니 나는 남편이 없네

박물관 어린이 프로그램을 마치고 저녁까지 먹은 후 발견한 석가탄신일 전등 전시. 예뻐서 산책도 할 겸 아이들과 언니, 동생과 구경 중이었다.


“아-주 나이스 하다아~”


이 한마디 했을 뿐인데 어떤 외국인 남자가 내 옆을 지나가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따라 말했다.


“아-주 나이스 하다아~”


남자의 목소리가 제법 컸다. 순간 옆에 있던 동생이랑 웃으며 눈이 마주칠 정도였으니. 게다가 발음도 엄청 좋았다. 동생 보고 웃다가 남자 쪽을 쳐다봤는데 남자도 뭔가 의식했는지 뒤돌아 내 쪽을 다시 쳐다봤고 눈이 마주친 나는 눈썹을 올리며 웃어 보였다. 잘 들었어요.


선선한 금요일 저녁, 광화문 거리는 퇴근하는 사람들과 산책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고, 또 보게 될 거라 생각하지 않은 그 외국인 남자와 브로콜리를 닮은 나무 앞에서 다시 마주쳤다.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남의 눈을 잘 쳐다보는 편이라고 친구들도 말했듯 나는 늘 하던 눈인사를 했다. 남자가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다가왔다. 나도 똑같이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는데 그가 말했다.


“아-주 나이스 하다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따라 하셨어요.”

“네, 말하는 거…… 말투 재미있어요.”

“그 말 가끔 들어요. 발음이 너무 좋아요. 한국어 배우는 중이에요?”
“네. 혼자 공부해요. 배운 지 얼마 안 됐어요.”

“와, 공부 많이 안 했는데 이렇게 잘하네요. 천재시구나.”


남자는 천재는 아니고 그냥 최근에서야 공부를 좀 열심히 했다고 했다. 프랑스 사람이라길래 유럽살이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왕자가 달려와 엄마 어디 있었어, 하며 품에 안겼다. 여기 아저씨(라고 하기에는 많이 잡아도 20대 후반이었지만)랑 얘기하고 있었다고 했다. 남자는 왕자를 보더니 너의 아들 뭐라고 뭐라고 말했다. 몇 번을 들어도 못 알아듣고서 결국 남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네? 그랬더니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Half?”

“하프?”


갸우뚱하며 손으로 절반 자르는 시늉을 했더니 남자가 끄덕이며 다시 하프냐고 그랬다.


“No, 100% Korean. Korean dad, Korean mum.”


아마도 왕자가 하얗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어딜 가나 희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머리카락이랑 눈동자도 조금 갈색이라서 그런가 생각하는데, 웬 한국 남자가 갑자기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친구인가 보다 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나고는 왕자에게 엄마 금방 갈게, 하는데 그 남자가 프랑스 남자에게 다짜고짜 자기는 코리안이라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친구가 아닌가?’


의아하던 순간, 한국 남자가 나를 보며 “Your wife?” 그랬다.


왕자 인물이 그 정도는 아닌데 이상하다 싶은 찰나, 프랑스 남자도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 같았다. 그도 나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No, no, he is not your husband?”


저 남자 둘은 정말 모르는 사이였구나. 그래서 모르는 한국 사람이 다가오니 내 남편인 줄 알았구나. 서로가 서로를 내 남편으로 오해한 이상한 상황. 내가 나섰다.


“No, I don’t have a husband.” 저 남편 없는데요.


두 남자가 동시에 놀랐다. 어쩌면 아직 내 허리를 붙들고 있던 아들 녀석도 놀랐을 수 있지만 걔가 허즈번드라는 단어를 모르길 바라며, 나는 아들 정수리 한 번 쳐다 보고, 어른 남자들도 번갈아 쳐다봤다. 민망해서 그랬는지, 아차 싶어 그랬는지 한국 남자는 인사도 없이 군중 사이로 사라졌다. 저 남자가 갑자기 오길래 네 친구인 줄 알았다고 했더니 프랑스 남자는 모르는 한국 남자가 갑자기 다가와서 내 남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다시 말했다.


“No, a total stranger. And I don’t have a husband.” (완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남편 없어요.)


좀처럼 할 일이 없는 그 말을 하고서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나는 정말 남편이 없으니까. 이제 없는 걸 어떡해. 그러자 남자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You don’t have a husband? And you have a son?” 남편이 없다고요? 아들은 있고요?

“And a daughter as well.” 그리고 딸도 하나 있어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이 많은 쓸데없는 소리를 여기까지 쓰게 한 그 놀라운 말을.


남편이 업서요? 이러케 예쁜데?

아아, 나는 취향이 세일인 여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내 취향은 빈말인가 봐.


말투가 재미있다고 그가 말했을 때는 그런 말 가끔 듣는다고 수긍했지만 어처구니없는 빈말에는 리액션이 제대로 고장나고 말았다. 못 들은 척 멀뚱하게 있었더니 남자가 다시 말했다.


“이러케 예쁜데 남편이 업서요?”

“없어요. 없어졌어요. 없앴어요, 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그는 이 다채로운 문법을 잘 알아들었을까. 탑 쪽으로 걸어가며 눈으로는 언니와 공주가 어디 있는지 바쁘게 찾으며, 나는 같이 온 가족들이 안 보인다고 말했다.


그 사이 프랑스 남자는 원래 파리에 살다가 도쿄로 워킹홀리데이를 왔는데, 잠시 한국에서 머무는 중이라는 말을 했다. 광화문에 자주 오지만 이런 전시는 처음 봐서 뭔지 궁금했다기에 부다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라고, 광장에 크리스마스 트리랑 마구간 전시하는 거랑 같은 거라고 알려 줬다.


그리고 그가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던 것 같았던 순간, 멀리서 공주가 엄마를 크게 외치며 뛰어왔다. 어디 있었냐는 원망 같은 말도 했다. 프랑스어를 아주 조금 배운 공주에게 이 아저씨 프랑스 아저씨라고, 에펠탑 있는 파리에서 살던 아저씨라고 말했다. 남자의 입에서 쏟아지는 프랑스어에, 프랑스어라고는 약간의 숫자와 ami(친구)밖에 모를 공주가 정신을 못 차리고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으며 그에게 저녁 잘 보내시라 인사를 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냐고 동생이 물었다. 아까 말 따라한 거 얘기하고 한국말 잘하더라는 얘기를 했다고,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이상한 말을 해서, 나도 아들은 있지만 남편은 없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고 전했다.


어쩌서인지 아직도 공주와 왕자의 친구 엄마들에게는 아무 말을 못 했지만, 한 번 보고 안 볼 사람에게는 이혼 얘기 하는 게 힘들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고 나면 내가 만든 이 상황을 조금 더 직시하게 된다.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이런 일이 생기면 내가 애 둘 딸린 이혼녀라는 사실을 마주하고 숙연해진다.

  

그나저나 반쯤 외국어로 나누는 대화에 끼고 싶었던 것 같은 그 평범하지 않은 한국 사람 덕분에 나는 아주 괜찮은 빈말을 들었고, 그 덕분에 미소 지으며 글을 쓴다. 글 쓰는 게 오락인 사람이라, 사람을 이렇게도 기억하고 가끔은 이렇게 쓴 글을 당사자에게 보내기도 하는 사람이라, 일본에서 왔다는 프랑스 남자와 그의 빈말을 이렇게 기록한다 :)


아마도 보리수 나무일 것 같은데 아무래도 브로콜리를 많이 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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