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더 미루지 않을 이유
둘째 어린이집에서 온 가족 나들이 행사가 있었던 어느 가을날. 할로운 파티까지 겸해서 원생들 가족 800명 정도가 모인다는데 처방받은 약 먹으랴, 출근하랴, 정신줄 놓고 버티는 동안 참석 인원수 확정을 못 했더니 왕자네 친절한 담임 선생님께서 네 명으로 신청을 해 두셨다고 연락이 왔다.
남편에게도 여러 차례 얘기했듯 나는 남편을 잃고 싶지, 아이들에게서 아빠를 뺏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 비록 남편과 같이 있는 시간 동안 내가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아빠니까 네 식구가 함께 행사에 가도 좋겠다고, 그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행사 전날 전혀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퇴근 후 저녁 챙기며 어린이집 행사에 남편도 같이 갈 것인지 의사를 묻던 중이었다. 딸아이가 갑자기 어른들의 대화를 뚫고 들어왔다.
아빠, 아빠가 같이 안 가면 좋겠어!
발랄한 공주의 말을 듣고 국 냄비에 불 올리던 내 마음이 무거워진 건 내가 아직 그 사람을 아껴서가 아니었다. 나보다 더 가슴 철렁했을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주에게 이유를 물었고, 아이의 대답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아빠가 안 가는 게 더 좋아! 그리고 저번에 아빠랑은 키즈카페 갔다 왔잖아. 우리는 아빠 없이 가면 더 재밌게 놀 수 있어! 엄마, 엄마는 어때? 엄마도 그렇지 않아?”
나를 왜 갑자기 끌어들였을까. 공주도 사실은 엄마의 기분을 다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엄마? 엄마는 다 괜찮아~”
차마 뒤돌아 아이 눈을 볼 수 없어 뒤통수로 대답하자 딸아이가 다시 말했다.
아빠, 아빠는 그냥 공부하고 있어, 우리는 아빠가 없어야 더 재미있다니까?
남편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게. 그날도, 호텔도 롯데월드 가자던 날에도 얘기를 꺼내자마자 좋아하며 엉클이랑 같이 가고 싶다고 했던 우리 아이들. 흐르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수많은 물고기 떼처럼, 공부에 지치고, 교회 일에 지친 아빠 없이 보낸 평일과 주말이 그렇게나 많았다.
캠핑 캠핑 노래를 불렀던 탓에 이모랑 엉클 불러 캠핑장에 다녀왔던 다음 날, 작고 소중한 공주와 왕자가 자기들끼리 킥킥대며 나눈 슬픈 대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누나, 캠핑 또 가고 싶다, 그치? 엉클이 아빠면 좋겠다, 안 그래?"
"맞아, 아빠는 놀아주지도 않고. 아빠랑 놀면 재미가 없다고오~!"
아이들도 같이 안 놀고 싶어 하는 아빠라니. 약 먹으며 참고 버틸 이유 하나가 그날 사라졌다. 스타벅스에서 싫어무새가 되었던 여름 끝자락. 아이들 관련 일 아니라면 시선 교환조차도 없이 가을이 끝나갔다. 그리고 쓰려던 논문을 또다시 마치지 못한 그 사람. 남편이 삶으로 써낸 텍스트는 결국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