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rd day Palos Verdes 20190727
3rd day 20190727
어제는 솔뱅(Solvang)을 들러 아름다운 해변에 자리한 Pismo Bay에서 묵기로 한 날이다. 아니 그런 날이었다.
전날 밤 디즈니에서 돌아와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든 탓에 아침에 곤히 자고 있는 수빈이와 수연이를 더 재우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바쁜 일정을 두고 마냥 재울 수도 없는 일이기에 눈을 뜨지 못하는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서 방을 나설 준비를 시키고 우리도 방 안에 늘어 놓은 짐들을 챙겼다. 수빈이 수연이가 어릴 적에는 아기용 짐만 한 보따리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짐이 한결 줄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 원 팩 폴리시(one pack policy)라는 것을 만들었다. 각자 백팩(back pack) 하나에 들어 갈 짐만 가지고 오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가지고 올까 말까 했던 많은 옷들을 고민 없이 두고 올 수 있어 많은 짐을 줄일 수 있었다. 큰 슈트케이스 하나와 작은 케리어 하나. 전에 비하면 슈트케이스 하나가 줄었다. 물론 빨래를 자주하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짐이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호텔방에 오면 늘어 놓게 되는 짐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하와이에 가기 전까지는 한 곳에 하루나 이틀씩 머물게 되니 짐을 풀었다가 싸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게 된다. 어제 아침에도 서둘러 짐을 쌌다. 아침에 윌슨파크에서 열리는 파머스마켓도 오랫만에 가 보아야 하고 팔로스버디스도 다시 한번 올라가 아름다운 등대 포인트빈센트를 다시 한번 보고 떠나고 싶었기에 마음이 바빴다. 짐을 들고 일층으로 내려가 아이와 아이들에게 차에 타 있으라 하고 나는 체크아웃을 하러 프론트로 갔다. 원래는 Fast Check-out이 가능하여 키만 박스에 넣어놓고 떠나도 되었지만 워낙에 꼼꼼한 성격인 나는 구지 프론트에서 체크아웃이라는 절차를 거치고 싶었던 것이다.
체크인 할 때 우리를 맞았던 요코라는 일본계 여자직원이 수속을 해 주었다. 보통은 키를 받고 몇가지를 확인하면 곧 다 되었다는 말을 해주는 데 왠지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보는 Yoko가 답답했지만 그녀도 곧 "체크아웃 되었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프론트를 떠나 호텔 정문을 나서려는 순간 요코씨는 종종 걸음으로 달려와 나를 붙잡아 세웠다. 우리 호텔이 하루 더 남아있다는 것이다. 아, 이게 무슨 말인가. 확인을 해보니 내가 이곳에 나흘을 묵기로 하여 호텔을 잡아 놓고 사흘로 착각한 것이었다. 씨익, Yoko상을 향해 웃어 주며 아주 조그만 착각이 있었다고 말하고 호텔방 키를 돌려 받았다. 아주 조그만(?) 착각을 와이프와 아이들에게도 설명해 주어야 했다.
우리는 차 트렁크 안의 짐들을 그대로 싣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정대로 파머스마켓(Farmer's market)이 가서 아침을 먹었다. 줄지워 세운 천막에는 막 수확한 과일과 야채를 가져다 팔는 인근의 농부들과 빵, 잼, 과자, 즉석 팝콘 등등 수제로 만든 여러 먹거리와 크레페, 덥밥, 에이드, 볶은 국수, 나초와 브리또 등 각양 각색의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모든 것이 싸고 맛있고 신선하다. 식사와 휴식을 위한 천막에는 널찍한 테이블이 여럿 놓여 있고 그 앞에는 흑인 아저씨가 철재 통을 두드리며 음악을 연주한다. 매주 토요일 열리는 이 시장은 우리의 전통시장, 오일장 등과 비슷한 모양새이다. 이곳에 살 때는 매주 토요일 이 시장에 와서 아침을 먹고는 막 나온 팝콘을 한 봉지 사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주말 루틴이었다.
수빈이는 블랙베리를 파는 집에서 시식을 해 보고는 너무 맛있으니 꼭 사고 싶다며 나를 가게로 끌고 갔다. 히스페닉계의 가게 언니는 수빈이가 오자 너 또 왔냐는 얼굴이다. 아마 수빈이가 눈치없이 너무 많이 집어 먹었겠지. 내가 한번 맛을 보겠다고 하니 수빈이 나를 따라서 다시 한 알을 집어 먹었다. 앞서 수빈이가 먹은 것까지 합하면 이미 5불짜기 바구니의 반 정도 먹은 샘이다. 이 집 블루베리가 맛있지만 그래도 다른 가게는 얼마에 파는 보고 사자고 옆 가게로 갔다가 결국 그 가게에서 같은 가격에 블루베리 한 바구니을 샀다. 물론 그 가게에서도 사기 전에 다시 한 알씩 맛을 보았으니 전반적으로 무척 싸게 산 것이지만 이곳에 살았던 주민으로서 지역 상인께 미안한 마음입니다. (앞으로 시식은 한 사람이 한 알 씩만!)
우리는 파머스마켓에서 밥 위에 넓직한 고기를 얹고 테리야키 소스를 뿌려주는 덮밥과 프랑스에서 온 사람인지 그렇게 보이는 사람인가가 만든 파르페를 먹고 윌슨파크를 걸었다. 수빈이는 회전 놀이기구를 보더니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아이들 속에 끼어 놀며 좋아서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그 어렸을 때 유모차에 앉아 동네 언니들 노는 모습을 부럽게 보던 수빈이였다.
정오가 되기 전에 우리는 토렌스의 관광 명소인 레돈도 비치(Redondo beach)로 향했다. 큼지막한 대게를 쩌서 파는 '한국 횟집'이 있는 곳이다. 해안을 따라 난 나무판자길을 걸었다. 해안을 따라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길을 낸 것을 보드웤(board walk)이라 한단다. 얼마전 보았던 미국의 갱 드라마 <앰파이어 오브 보드웤>(The Empire of Board Walk)이 떠올랐다. 다행히 레돈도비치의 보드웤은 그저 평화롭고 한가롭다. 해안선을 따라 한참을 걷다 가게들을 돌아 보고 내가 그리워하던 서점 반스앤노블로 차를 몰았다.
반스앤노블(Barnes and Nobel)은 하버드 대학 앞 하버드 쿱(Harvard Co-op)과 함께 오래전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점이다. 단순히 책을 사기 위한 서점이라기 보다 많은 책들 사이를 걸으며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고 커피를 마시며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어 좋다. 일본에서 나와 와이프가 좋아하는 서점 츠타야(Tsutaya)도, 사람이 너무 북적거리는 느낌이 있지만 역시 내가 좋아하는 교보문고 등 넓은 공간에 카페와 함께 자리한 서점의 모델은 이런 미국식 대형 서점이다. 주로 건물 안에 들어서 있는 한국과 일본의 서점들에 비해 단독 건물에 들어선 반스앤노블은 훨씬 더 천장이 높고 공간이 여유롭다. 커다란 빨간 벽돌 건물 자체가 서점이라는 하나의 커다랗고 단단한 이미지를 뿜어내는 데, 그 중에는 볼티모어(Baltimore)의 매장처럼 거대한 발전소를 서점으로 바꾼 곳도 있다.
수빈이는 <라잇더스토리>(Write the Story)라는 각 페이지의 주제와 질문에 따라 글을 쓰는 노트를 샀고 수연이는 프린세스가 나오는 그림책을 골랐다. 생각해 보니반스앤노블은 내가 미국 생활 중 가장 좋았했던 곳 중 하나가 아니였나 싶다. 한 때 나의 책상 앞에는 이런 서점을 스케치한 카페앤북스(Cafe and Books)라 메모가 붙어 있었다.
호텔 근처 코인 빨래방에서 삼일치 빨래를 했다. 단 삼일분인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다행히 모자랄 듯 했던 나의 옷들도 좀 여유가 생겼다. 건조기에서 빼낸 빨래들을 싣고 우리는 조금 일찍 팔로스버디스로 올라갔다. 언덕 위의 스타벅스에는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예전 바다 쪽을 향해 놓여 있던 쇼파들은 없어지고 대신에 더 많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고래박물관(whale's museum) 근처에 차를 세우고 등대 포인트빈센트(Point Vincent)를 향해 걸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있는 멋스러운 이 등대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등대이며 육지에서 가장 가까이서 고래를 볼 수 있다는 곳이다. 지금 센디에고에 있는 씨월드(Sea World)는 원래는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단다. 센디에고로 확장 이전을 한 씨월드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고래 박물관이라는 작은 박물관이 남아있다. 이곳은 애초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아직도 살아있는 신생대 지형을 가진 이 곳은 너른 허브 밭 사이로 산책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나아 가면 깎아지른 절벽이 나오고 그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멋진 일출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이어진다. 이곳에는 커다란 파인애플을 땅에 박아 놓은 것 같이 생긴 나무도 보이고, 시조새처럼 커다란 새들도 머리 위를 줄지어 날아다닌다. 신생대로 돌아온 듯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해는 내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늦게 졌다. 바람은 차가워졌지만 수빈이와 수연이는 너른 잔디 위에서 뛰어 노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오랫만에 팔로스버디스와 그곳에서의 석양을 충분히 보았다.
저녁은 낮에 보아두었던 '강호동의 백정'에 가서 고기를 먹었다. 최근에 문을 연 모양이다. 평소에 입이 짧은 수연이가 잘 먹어 다행이다.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는다. 나의 사랑하는 와이프와 두 딸들이 함께이니 더 아름답고 더 맛지다. 좋다. 아주 좋다. 게다가 오늘은 덤으로 하루를 더 얻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