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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디카 명상 센터

위파사나 명상 센터 체험기 1

by 박종호

2019년 여름 일본 치바에 있는 명상센터, 담마디카에서 열린 열흘간의 명상코스를 다녀왔다.


담마(Dhamma)센터는 미얀마 출신인 고엥카(S.N. Goenka)선생이 위파사나 명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인도에 설립한 명상 센터이다. 초기 불교의 명상 수행법인 위파사나 명상을 지향하여 담마 위파사나 명상 센터라고 불리는 데 담마디카 명상센터는 이 중 일본 치바에 있는 담마센터의 이름이다.


고앵카선생은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사업가의 길을 갔지만 젊어서부터 심한 편두통을 앓았다. 자신의 편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미얀마(버마)의 명의들을 모두 찾아 다녔지만 그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었고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머리에 몰핀을 주사하는 것 밖에 없었다. 어느 날, 그의 주치의는 더 이상 몰핀 처방을 계속하면 몰핀 중독에 걸릴 터이니 최소한 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나라에 가서 치료를 받아보라고 권했다. 선생은 의사의 말에 따라 편두통을 치료하려 미국과 스위스 등 여러 나라의 의사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결국 어떤 의사도 그의 편두통을 치료하지 못했고 다시 미얀마로 돌아온 그는 한 친구의 권유로 미얀마에 있는 한 명상센터를 찾아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스승을 만나 2500여년 전 붓타에 의해 시작된 위파사나 명상을 배우게 된다.


고앵카선생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아무도 자신의 편두통을 치료하지 못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당시 미얀마, 미국 혹은 스위스 어느 곳에서 선생의 편두통이 치료되었다면 자신은 위파사나 명상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또 위파사나 명상이 전해 준 담마, 곧 진리(眞理)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고앵카선생은 미얀마에 위파사나 명상을 통하여 붓타가 발견한 우주의 보편적인 법칙인 담마(Dhamma)를 깨닫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 명상법과 담마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은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인도로 건너가게 되는 데, 그곳에 머무르던 중 미얀마에 계신 스승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에게 담마를 전해준 스승에게 보은을 하고 싶던 선생은 이를 계기로 스승이 평생 바라던 데로 인도 사람들에게 위파사나 명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인도에 담마센터를 세운다. 이렇게 시작된 담마센터는 현재 전세계에200여개 센터가 있고 각 센터마다 초기수행자가 참가할 수 있는 10일 코스와 이를 마친 구수련생들을 위한 다양한 코스가 진행되고 있다. 참가 목적의 순수성을 위하여 모든 코스의 참가비는 무료이며 놀랍게도 모든 비용은 오로지 수련생들의 자발적인 기부(Dana)로 이루어 진다.



위파사나 명상 (Vipassana Meditaion)


위파사나 명상은 호흡에 집중하는 명상, 아나빠나와는 달리 신체의 감각에 의식을 집중 한다. 어려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호흡에 집중한 명상을 해왔던 나는 위파사나 명상의 감각에 집중하는 방법이 낯설게 느껴졌다.


명상 센터에 들어가 첫 3일간은 아나빠나 명상(호흡 명상)을 하는 데, 처음에는 자연스러운 호흡에 집중하며 코 전체에서 느껴지는 느낌에 집중을 하고 다음 단계에는 콧구멍 입구와 윗입술의 공기가 지나다니는 부분에 집중을 한다. 모두 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준비이다.


4일째 정오가 지나서 본격적으로 위파사나 명상에 대하여 배우게 되는 데 코스에서는 이 날을 위파사나 데이(Vipassana Day)라고 부른다. 아나빠나 명상을 하며 몸의 좁은 면에 집중하여 그곳의 느낌들을 느낄 수 있게 되면 그 느낌을 느끼는 인식을 정수리로 옮겨 느낌을 느낀다. 정수리로 부터 시작하여 발끝으로, 다시 발끝에서 정수리로 의식을 이동하여 마치 스캔을 하듯이 몸 전체의 감각을 빠짐없이 순서대로 느끼고 또 각 부분에 집중하여 감각을 자세히 관찰하기도 한다.


우리 마음은 신체의 오감을 통하여 외부의 사물을 인식한다. 우리의 마음은 대상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대상에 대하여 ‘좋다’ 혹은 ‘싫다’라는 마음이 생기는 데 이런 ‘좋고 싫음’은 반응은 우리의 몸이 대상에 대하여 일으키는 느낌에 대한 우리 마음의 반응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 예를 들어 바퀴벌레를 보면 그것을 바퀴벌레라고 인식하는 순간 우리의 몸에 어떤 감각(느낌)이 생겨나고 이 느낌들에 대하여 우리는 싫다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즉, 혐오라는 반응을 한다. 대상에 대한 반복된 반응, 즉 바퀴벌레가 우리 몸에 일으키는 느낌에 대한 혐오가 반복되면 이는 대상에 대하여 즉각적인 혐오의 반응을 일으키는 습관(습)이 되는 데 이런 습을 일으키는 것을 상카라, 즉 업장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 많은 습관화된 마음의 반응, 상카라를 가지게 되는 데 고앵카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이들 중 어떤 것들은 물에 선을 그은 것처럼 바로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모래사장 위에 선을 그어 놓은 듯이 파도가 지나가면 혹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 있는 가 하면, 어떤 상카라들은 마치 정으로 바위에 깊숙이 세겨 놓은 선처럼 아무래도 잘 지워지지 않는 것도 있다. 이런 상카라가 우리 마음에 습관적으로 일으키는 반응을 집착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집착은 어떤 대상에 대한 ‘갈망’과 ‘혐오’로 나타난다.


우리가 인식하는 외부의 대상은 항상 변화하고 있다. 즉, 무상하다. 붓타 시대의 언어(팔리어)로는 무상함을 “아닛짜”라고 부른다. 무상한 대상에 대하여 인식을 하고 있는 우리의 몸도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우리의 마음도 찰라 순간에 생사노멸의 반복하는 무상한 존재이다. 그러니 대상이 우리의 몸에 일으키는 느낌들 또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존재이다. 이러한 무상한 존재가 무상한 대상에 느끼는 무상한 느낌들을 마치 영원한, 고정된 것으로 여기어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의 습관 즉 상카라(업장)이다.


위파사나 명상은 우리 몸의 구석 구석 일어나는 감각을 관찰한다. 그 느낌이 어떤 것이든 차별하지 않고 즉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바라보며 좋다 혹은 싫다라는 반응을 하지 않는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몸을 관찰하듯이 우리 몸에 일어나는 느낌들은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그 느낌들에 반응하지 않으면 즉, 좋다 혹은 싫다는 마음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새로운 상카라(업장)가 생겨나지 않는다. 새로운 상카라가 생겨나지 않으며 그동안 반복된 반응으로 강화되었던 오래된 상카라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하나 하나 사라지게 된다. 즉 그동안 고정된 인식과 반응을 만드는 업장이 소멸되므로 이 업장으로 인하여 생겨났던 집착과 혐오가 사라지게 된다. 집착과 혐오는 모든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므로 이 명상법은 마음의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감각을 그 감각이 크던 작던, 강하던 약하던 차별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강한 감각일 수록 쉽게 인식하고 그 느낌에 강하게 반응한다. 몸의 어디에선가 고통이 일어나면 다른 부분에서 일어나는 작은 느낌들, 간지러움이나 스치는 느낌은 인식할 수 없게 되고 오로지 “아프다”라고 느낌만이 우리의 인식을 지배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곧 그 느낌에 대하여 벗어나고 싶은 마음, 혐오를 일으키기 시작된다. 하지만 그 감각은 크던 작던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 ‘아닛짜’이다. 그러니 무상한 것에 혐오와 갈망을 일으키지 말고 단지 바라보아야(관찰하여야) 한다.


나는 아직 나의 고통에 대하여 마치 의사처럼 바라보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명상을 하던 중에 조금은 감각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명상이 나의 마음에 갈망과 혐오를 일으키는 오래된 상카라를 없애고 있는 것인지 아직 확실히 이야기할만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나의 느낌들을 관찰하며 마음이 집착을 만드는 과정과 나의 습관적인 반응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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