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4 안국
오후 다섯 시가 되었다. 퇴근시간이 30분이 남았다. 오늘 중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았지만 영 일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창 밖 날씨는 비도 오지 않는 데 벌써 거리가 어둑어둑해졌다. 기분이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다. 몸은 왠지 축 늘어져 당장에라도 이불속에 기어들어가고 싶고, 기분은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그런 저녁시간이다.
지금이라도 커피를 한 잔 마셔야 하나, 생각해 보았다. 아니, 그럼 분명 오늘 밤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것이다. 요 며칠 나는 자주 잠에서 깬다. 한 밤 중 화장실에 가려 한 번 깨면 웬일인지 좀체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한참 누워서 멀뚱 거리다가 결국 유튜브를 켠다. 밤에는 주로 책을 읽어주는 유튜브를 틀어 놓고 들으며 잠이 든다.
어제도 나는 새벽에 잠에서 깼다. 2시가 막 넘은 시각에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다. 방에 불을 켜려다 말았다. 그랬다가는 눈앞에 이것저것을 펼쳐 보다가 아주 잠을 못 자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연결된 충전선을 뽑고 핸드폰을 침대로 가져가 누웠다. 전원 버튼을 누르니 눈이 부시다. 가느다란 실눈으로 위아래로 화면을 넘겨 책을 읽어 주는 유튜브 채널 하나 찾아 열었다.
패널 셋이서 책을 소개하고 줄거리를 따라 책의 구절들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어 주었다. 4년 전에 만들어진 영상이었지만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찾는 이가 많았는지 나에게도 유튜브 첫 페이지에 추천되었다. 책 이야기를 들으며 잠을 청하려던 의도와는 달리 패널들의 소개와 낭독을 들으며 나의 정신은 점점 더 또렿해져 갔다.
그저 이 책의 이야기를 듣고 책의 몇 구절의 낭독을 듣는 것만으로 애간장이 끓고 분노가 일고 소설 속 화자들과 함께 절망 속을 헤매었다. 글의 힘은 이리도 무섭다. 두 시간이 넘는 프로그램이 끝나갈 즈음, 나는 더 이상 누워있지 못하고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분노인지 연민인지 둘 다인지,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소설은 독자를 끌고 현장으로 들어간다. 소설은 독자를 등장인물에 빙의시킨다. 우리는 빙의된 소설 속 인물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으며 입으로 말한다. 소설은 우리가 글을 읽는 동안 이야기 속 세상에 등장인물로 산다. 책을 덮으며 현실로 돌아오면 꿈에서 깬 우리는 돌아온 현실에 안도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빙의된 세상 속에서의 느꼈던 온갖 감정이 남아 꿈틀거린다.
<소년이 온다>는 읽기 힘든 책이다. 몇 구절의 낭독을 들으며 나는 이미 이 책이 읽기 힘든 책임을 알아버렸다. 읽히기 힘든 책이 아니고 그 안의 깊은 감정들을 감당하기 힘든 책이다. 그 안에 들어가 화자가 되어 듣고 보고 말을 하면,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속 세상에서 살고 나오면, 나는 그 세상에서 지고 나온 감정의 응어리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울음을 참을 수 있을까, 소리 내지 않고 흐느낄 수 있을까.
<소년이 온다>는 읽기 힘든 책이지만 꼭 읽어 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난밤 우연히 소설 속 몇 구절을 듣고 울음보가 터지고 나니 더욱 큰 각오가 필요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꼭 읽어 보고 그 안에서 살아 보리라 마음먹었다. 미쉐랑 식당에 연거푸 실망한 나는 미쉐랑 식당이라 하면 일단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동안 나는 노벨상 수상작들을 보며 요란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미쉐랑 식당처럼, 유명세와는 달리 재미없는 작품들이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책들을 허투루 보지 않기로 했다. 모두 한강 작가의 덕이니 노벨 위원회는 한강 작가에게 고마워할 일이다.
이제 그런 일도 쉽지 않겠지만 우연한 기회에 한강씨와 만나게 된다면 내 흔쾌히 이 시대의 작가에게 밥 한 끼를 모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