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으로 가는 길, 택시 타다에는 소설가 한강의 책이 두 권 꽂혀있었다. 이전에도 이용객들에게 방향제나 인스턴트 원두커피를 나누어 준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나누어 주지 않고 비치하는 것만으로 고객들의 격을 높여주는 멋진 마케팅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한강의 책을 읽어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채식주의자> 중 <작별하지 않는다>를 펼쳤다.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책을 절반 정도 읽었다. 목공예를 하다 손가락이 잘린 친구의 새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제주도에 도착한 주인공이 폭설 속에 갇혀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새는 솜털처럼 가볍다. 날아오르기 위해 몸을 가볍게 하려 뼈에도 구멍이 숭숭 나 있다고 한다. 새는 몸이 안 좋아도 본능적으로 꼿꼿이 앉아 있는다. 천적들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다. 새는 사흘을 굶으면 죽는다. 그러니 경하는 인선의 새를 살리기 위해 제주도 외진 마을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택시가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읽던 페이지의 숫자를 되뇌고는 책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인선의 앵무새는 아직 살아있을까?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을 배웅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읽다만 소설의 내용이 맴돌았다. 새는? 인선의 이어 붙인 손가락은 3주간 매일 10분마다 바늘로 찔러 신경을 살려 내야 한다는 데, 팔에 잘못 힘을 주면 이어 놓은 신경이 끊겨 어깨부터 절개하여 신경을 다시 찾아 이어야 한다는 데, 간혹 패혈증으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는 데... 그런데 인선의 새는 아직 살아있을까?
한국은 이른바 한강의 붐이다. 나는 얼마 전 산책길에 한강 작가가 운영한다는 서촌의 서점 앞을 지났다. <책방 오늘>. 회사 사무실과 지척의 거리여서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는 길이었다. 책방의 문에는 작가의 손글씨인 듯한 메모가 적혀 있다. "당분간 책방을 쉬어갑니다." 이른 시간 탓인지 책방 앞은 사람이 없었다. 나는 창에 바싹 다가가 책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쪽 벽면에 나무로 된 책장이 서 있고 책들이 너무 빽빽하지 않게 꽂혀있다. 마치 교수 연구실의 서재를 보는 느낌이다. 작가가 읽었을 수많은 책들 중에서 추리고 추린 책들이리라. 나는 지나다 독립서점이 보이면 보통 들어가 보는 편인데 이곳은 처음이다. 한강 작가가 유명해지기 전에 들러 한강씨와 안면이라도 트고, 가까운 동네에 사는 지연과 내게 먼 선배뻘 되는 학연을 끌어들여 좀 친하게 지내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한강의 책은 서점에서 연일 매진 행렬이다. 인터넷에서 주문해도 며칠을 기다려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선의 새는 아직 살아있을까, 경하는 폭설을 뚫고 인선의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이런 괜히 책을 집어 읽었네. 이야기는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책을 어디서든 빨리 구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데, 눈앞에 공항 안의 서점이 보였다. 설마, 그래도 혹시... 역시! 서점에는 작가의 책이 여러 권 남아있었다. 나는 얼른 <작별하지 않는다>를 집어 들었다.
공항버스를 타고 안국동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또 한참을 읽었고 내친김에 사무실에서 책을 마저 다 읽었다. 작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산 자와 죽은 자를 만나게 하고 새들의 혼을 불러내었다. 혼인지 생인지 모를 경하와 인선이 이야기를 나누고,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 가족이던 인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잊고 지낸 역사적 비극의 한가운데 독자를 떨구어 놓았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불편함을 느꼈다. 단지 정서적인 불편함을 넘어 주인공 경하가 원인 모를 편두통에 위액을 게워내는 것처럼 실제로 몸에서 불편함이 느껴졌다. 지반이 흔들리면서 느껴지는 울렁거림 같은 느낌이다. 지난밤 새벽에 깨어 유튜브로 한강의 <소년은 오지 않는다>의 낭독을 들었다. 5.18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의 가족 이야기이다. 컴컴한 방에서 혼자 흐느껴 울며 그때에도 이런 느낌이 있었다. 이 메스꺼움은 무엇인가.
내가 대학을 들어가던 94년, 대한민국에서 첫 민간인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극렬하던 학생운동의 시위가 잠잠해졌고 캠퍼스는 자유의 물결로 넘실대었고 X세대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의 관심은 사회 문제에서 개성의 표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가끔 선배들을 통해 군부에 의해 왜곡되고 가려진 대한민국의 근현대 역사와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 듣기도 했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군부 독재라는 거대한 적이 사라진 대학 가는 저항 정신과 함께 올바른 역사 잇기에 대한 관심도 급속도록 줄어들었다. 나는 좋은 세상에 대학생이 되어 최루탄 냄새를 맡지 않았고 운동가를 부르지 않았으며 그 대신 나이트클럽의 비트에 몸을 맡기고 담배 연기에 쌓여 새내기 시절을 보냈다.
결국 나는 이 나라 역사의 비극적 사건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다. 내가 역사 교육을 받는 동안 그 시절 나라를 지배했던 사건의 가해자들은 교과서 안에 단 몇 줄로 자신이 벌인 사건들을 왜곡하고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기회가 있었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보다 더 정의로울 수 있던 나이에 부조리를 외면하였던 것이 이제 와서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소설이 일깨워준 자각이다. 역사를 바로 알자는 장황한 구호 보다 소설 속 이야기의 힘이 백 배 천 배 강하다.
어두운 과거를 잊고 밝은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자. 이런 구호 속에 과거에 대한 반성 없는 용서와 망각이 일상화된다. 역사적 비극 속에 사라져 간 희생자들, 여전히 그 비극을 살아가고 있는 생존자와 그 가족들에 공감하고 동조하지는 것을 불온의 눈빛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사건에 희생된 개인과 유가족들은 그저 억울하다. 그들은 어느 곳에 제대로 하소연할 곳 없이 속않이만 하며 살아왔다. 한번 왕좌에 오른 세력은 뿌리 깊게 이 사회에 자신의 수족을 심어 놓는다. <서울의 봄>이란 영화가 너무나 적절히 역사의 부조리를 조명하지만 이 오래전 이야기도 그 수괴가 죽고야 세상에 나왔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그 응어리들을 가슴속에 묻고 조용히 살아가 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잘 나가는 대한민국의 잔혹한 과거가 막 불기 시작한 K-붐의 인기를 떨어뜨릴까 봐 불안해하는 것일까. 잘 나가는 대한민국의 무결점을 외치고 싶은 것인가. 하지만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야 말로 한강의 소설이 보여주려는 이 사회의 부조리이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위하여 희생자들의 입을 닫게 한담녀 독재를 위해 반공을 외치며 군홧발로 생사람을 때려잡던 논리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잊혀가는 진실, 위로받지 못하는 희생자들, 회복되지 못하는 인간성, 반성 없는 망각. 한강 작가가 소설을 통하여 지난 과거를 들추고 그것이 아직 끝난 과거가 아니라고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불편함은 이런 과거를 마주하며 모른 척 살아오고 침묵으로 동조하였던 양심의 외침이다.
우리는 왜 역사의 진상을 마주 보아야 할까. 소설이 보여주듯 역사 속에는 개인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이름 없는 무수한 개인들의 희생을 보듬고 위로하는 것은 어두운 역사의 반복을 막는 일에 앞서 이 사회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라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 <작별하지 않는다>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