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대산홀 250528
몇 년 전 압구정동에 있는 한 와인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당시는 사람들을 만나면 와인을 마시고 와인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꽤나 지적으로 보이던 때였다. 나는 코스가 끝날 때까지 개근을 하며 열심히 시음하고 와인의 종류와 유럽의 가본 적이 없는 지명을 머릿속에 넣으려 노력했다.
'가을비가 내린 산에서 나는 낙엽 냄새가 느껴지시나요?' 비가 온 가을날 산에 올라간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뚜렿하지 않다. 그래도 이것저것 마시고 비교하다 보면 와인을 마시며 가을 산에 비가 내리고 쿰쿰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낙엽을 떠올리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지방에 가면 일부러 투어버스를 탄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 반나절만에 모르던 여러 정보를 알게 되고 그때부터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새롭게 보인다. 고궁을 걸어도,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어릴 적 유행했던 텔레비전 프로인 <러브하우스>에 출연했던 건축가 양현석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러브하우스>에 나오는 양현석이란 사람을 알면 '연식이 좀 된 사람'이라 하였지만 새파랗게 어린 나도 그를 알고 있다. 그는 20여 년 전 단 6개월간 텔레비전을 출연한 것이 방송출연의 전부였다고 한다. 그는 방송 출연 이후 본연의 건축가로 강사로 그리고 7집까지 앨범을 낸 음악가로 살고 있다.
그가 강단 위로 오르자 TV 속에서 보았던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유명세를 타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사람들은 잘 안 늙는 모양이다. 목소리도 그대로이다. 그는 자신의 책 <양진석의 유럽 건축사 수업>을 쓰게 된 계기부터 이야기를 풀어갔다. 일본의 최고 명문인 교토대학교에서 석박사를 한 그는 대학원 수업 중에 끊임없이 유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부터 유럽으로부터 근대문명을 빠른 속도로 받아들였다. 일본의 현대적 건축이 유럽에 근간을 두고 있으니 유럽을 빼놓고 일본의 건축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실은 우리가 접하는 세계의 모든 현대적 문명과 문화는 유럽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유럽을 보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척도이다. 유럽의 건축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 건축을 이해하는 지적 프레임이 되어 준다.
그는 고대의 그리스 로마의 건축에서 바로크까지 이어지는 건축 양식의 변화는 결국 로마식 건축양식과 비로마식 건축문화가 서로 세를 주고받으며 변화해 온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뛰어난 선생은 학생의 머리에 그 무엇이든 써먹을 만한 것을 남긴다. 그가 책에 쓰지 못했던 '태종태세문단세' 같은 각인은 '그 로비를 걸어봐!'이다. 그리스 로마(로마풍)/ 비잔틴(비로마풍) / 로마네스크(로마풍) / 고딕(비로마풍) / 르네상스(로마풍)의 앞 글자를 딴 암기법이다. 그는 학력고사 세대임이 분명하다.
작가는 각 시대의 건축물의 그림과 사진을 보여주며 각 시대 건축의 특징되는 양식들을 설명했다. 변화의 흐름과 맥락이 잘 이해되는 강의였다. 무엇보다 오래전 건축 양식들이 지금의 건축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어떻게 오마주 되고 있는지가 잘 연결되었다. 강의 중에 내가 보았던 건물들의 사진도 여럿 나왔다.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전에 보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 건축도 그렇다.
아주 좋은 강의를 들었다. 건축사를 공부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