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는 밤에
밤 사이 태풍이 후쿠오카 옆을 지나간다는 뉴스에 베란다에 놓인 물건들을 모두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과연 초저녁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은 점점 더 거세어지더니 밤이 되자 엄청난 힘으로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시끄러운 바람 소리에 한 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지만 결국 바람 소리 때문에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거, 바람이 엄청나게 부네.” 와이프도 혹시 나처럼 잠에서 깨지 않았을까 하고 혼잣말을 하듯이 슬쩍 말을 건네 보았지만 와이프는 이 소란 속에도 잠만 잘 잔다. 나는 멀뚱히 바람 소리를 듣다가 심심해지어 컴컴한 거실로 나와 앉았다.
i.
섬나라 일본은 태풍이 잦다. 남쪽 섬 규슈는 대부분의 태풍이 북상하며 지나가는 관문 같은 위치에 있어 우리 동네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태풍의 경로에 잔뜩 귀를 기울인다.
기상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야채값이 널뛰기를 한다. 코로나 사태 이후 반(半) 주부가 되어 가끔 장을 보는 나는 ‘밥상 물가’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야채 가게에서 서너 줄기를 묶어 100엔에 팔던 대파가 한 줄기에 100엔으로 둔갑하는 극적인 물가상승을 경험하면 라면에 썰어 넣는 파의 양을 은근히 신경 쓰게 되고, 반대로 야채가 쑥쑥 자라 덤으로 줄만큼 가격이 싸지면 왠지 기분이 좋아져 예정에 없이 한아름 장을 보아 오기도 한다.
ii.
일본은 최첨단의 기상예보 시스템과 지진 감지 및 경보 시스템 등 전 세계 최고의 재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민간에도 기상 산업과 재난 보험, 재난 용품 산업이 잘 발달되어 있고 서점에 가면 재난 관련 책자와 재난 대비 상품들을 소개하는 잡지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항상 유사시를 대비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사는 일본에 최근 예상하지 못한 재해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한 지역에 순간적으로 엄청난 구름이 형성되어 단기간에 많은 비를 뿌리는 이른바 국지적 폭우가 빈번히 발생하고 장마가 되면 역사적인 강수량을 기록하거나, 반대로 폭염이 연일 이어지는 이른바 기후 변화로 인한 기상재해들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는 일본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구적 현상이다. 환경론자들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의 변화에 이어 지구의 사막화에 대하여 경고한다. 인간의 질주로 인하여 지구 생태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그들이 경고하는 지구의 암울한 미래가 등장한다. 사막이 되어버린 지구에는 한 두 종의 농작물만이 살아남고, 인간이 더 이상 살지 못하는 땅이 되어버린 지구를 대신할 별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이다. 끔찍하지만 지구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후 변화와 사막화 현상을 근거로 한 지극히 현실적인 가정이다.
우리의 미래가 영화처럼 흘러간다면 미래의 밥상은 오늘날과 같은 버라이어티를 찾아보기 힘든 삭막한 풍경일 것이다. 기후 변화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지구 온난화가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거창한 문제이기 이전에 오늘 우리 집 밥상의 문제인 이유이다.
iii.
우리는 올해 초부터 전개된 코로나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시대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하여 달라진 일상들이 이제는 익숙함으로 바뀌어 간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통하여 “세상에는 ‘설마’했던 어떤 일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라는 교훈을 얻었다.
다행히 이 교훈은 비관적인 일들 뿐 아니라 낙관적인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 교훈을 희망적인 방향으로 적용하면 우리가 그동안에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긍정적인 일들도 언젠가는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질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가 영화에서처럼 사막으로 변하는 비관적인 현실이 가능하다면 동시에 낙원이라 부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가능한 이상적인 생태계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역시 ‘설마’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얼마 전 사람들이 활동을 멈추자 마법처럼 푸른 하늘이 펼쳐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진부하지만 어떤 일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라는 만고(萬古)의 진리로 돌아온다.
iv.
아침이 되자 바람은 멈추고 하늘은 언제 그랬었냐는 듯 맑게 개었다. 아이들은 마스크를 쓰고 삼삼오오 학교로 향한다. 저들은 밤 사이 바람에 부러져 길 위에 흩어져 있는 잔 나뭇가지들을 내키는 방향으로 발로 차 대거나 힘껏 밟아 딱! 딱!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교문을 향해 행군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도착하면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점심 급식 시간만을 기다릴 것이고 첫 번째 쉬는 시간이 되면 이미 저들의 배는 꼬르륵거리며 ‘밥을 달라’고 아우성 칠 것이다.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급식에 대한 생각밖에 없다. 우리는 안다. 우리도 그랬으니까.
중국 속담 중에 “사람은 철이요 밥은 무쇠다”란 말이 있다. (人是铁,饭是钢) 무른 철이 쓰임이 있는 무쇠가 되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에게는 먹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다음 주에 온다는 태풍은 역대 최대급이란다. 나의 반(半) 주부로서의 먹거리 걱정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