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가 지배하는 코로나의 세계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의 저자 스티브 존슨의 최근작인 ‘미래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안에는 “개인적인 결정: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법”이라는 아주 매혹적인 쳅터가 있다(5장). 저자는 우리 앞에 놓인 수 많은 선택지 중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각각의 선택지 별로 앞으로 전개될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대비할 수 있어야 하는 데, 이를 위해서는 사태와 연관된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공감능력이라 부르는 이 능력을 발달시키는 데에는 소설읽기 만큼 좋은 훈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코로나19의 전지구적인 빠른 확산과 그 보다 훨씬 빠른 공포의 확산을 지켜보며 얼마전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책을 좀 읽는 사람들은 “이제야 사라마구라니 왠 뒷북이냐”라 하겠지만 이 책은 내가 ‘IMF사태’ 이후로 거의 처음 읽은 장편 소설이다. 반곱슬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책장을 넘기던 하얀 얼굴의 문학 소년이 어떻게 문학과 멀어졌는가라는 눈물겨운 이야기는 기약없는 나중으로 미루자.
아래는 오랫만에 읽은 장편소설의 요약.
‘눈먼 자들의 도시’는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차 안의 운전수가 갑자기 눈 앞이 온통 하얗게 ‘보이며’ 시작된다. 흰 색으로 ‘눈이 먼다’는 설정은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이다. 우리는 눈이 보이지 않으면 밀폐된 방 안에서 불을 끈 것처럼 컴컴해진다고 생각하지만 검게든 희게든 형태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눈이 먼다’는 증상이다.
갑자기 눈이 머는 병은 원인도 모른채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여 눈이 먼 사람과 그의 가족, 그와 접촉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격리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눈먼 자들은 수용소에 밀어 넣어진 채 방치된다.
법과 규칙의 힘이 미치지 않는 수용소 안에서는 눈먼 자들 중 힘과 총을 가진 자들이 제한된 음식을 독차지하고 음식과 힘을 이용하여 배고픈 눈먼 자들을 착취하고 유린하기 시작한다. 눈먼 이들이 이전과 달라진 것은 단지 ‘눈이 멀었다’는 것 뿐이지만 이들은 눈이 멀었다는 이유 하나로 힘과 먹이가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로 치달린다.
모든 이들이 눈먼 자들의 세상에 익숙해져 가고 있을 때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눈이 멀었음’에도 여전히 ‘인간의 존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그 안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의 아내의 기지로 ‘눈먼 악당’들을 태워버리고 수용소를 탈출한다.
그들이 나온 수용소 밖 세상은 이미 눈먼 자들이 따로 없는 모두가 눈이 먼 세상이 되어 있다. 길거리의 개들은 굶어 죽은 사람의 살점을 뜯어 먹고 사람들은 건물 벽을 손으로 짚으며 냄새로 음식을 찾아 다닌다. 참혹한 광경의 유일한 목격자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이다.
그녀는 인간이 인간성을 잃어 버리고 짐승이 되어가는 참담한 현실을 보며 차라리 눈이 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녀에게는 눈이 먼 남편과 수용소에서 데리고 나온 몇몇의 눈먼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삶의 목적이 있다. 그들은 눈이 멀기 전에 살던 집을 찾아 들어간다. 그곳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비록 눈은 멀었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타인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들이 ‘인간’으로 눈먼 세상에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아침, 세상의 모든 눈먼 이들은 그들이 눈이 멀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세상이 다시 보이게 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따옴표는 필자가 임의로 씌움)
소설의 마지막에 의사와 의사 아내가 나누는 대화에서처럼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우리가 보고 있지만 보지 않는 혹은 보지 않으려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우리가 보고 있지만 보지 않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혹시 그것은 우리 주변 도처에 널려 있지만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는 않을까. 권력과 공포 앞에서 드러나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모습들을,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착취하는 모습들을, 인간 본성의 부끄러운 민낯을 수 없이 보고 있지만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혹은 나의 일이 아니라며 애써 침묵하고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은 2020년 3월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