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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Mar 31. 2022

무라카미씨 이야기

소설가가 될 뻔했던 그의 회상

"실례합니다, 혹시 일본인이세요?" 무라카미 씨는 그에게 말을 건네어온 남자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서른 중반 즈음되었을까. 토요일 오전 흰 와이셔츠에 양복바지를 입고 와인 코너 앞을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보아 이 남자는 이곳으로 발령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영어로 말을 걸어온 남자에게 굳이 일본어로 대답한 것은 그와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나름의 표현이었지만 남자가 이번에는 영어보다 더 어색한 일본어로 말을 이어갔다. "저기, 저는 존박이라고 하는데요, 한 달 전에 서울에서 이곳으로 발령받아 왔습니다. 근처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고요" 그가 알고 있는 일본어 단어를 총동원하여 이어 붙였을 법한 구구절절한 이야기 중에 정작 그가 하려던 이야기를 추리자면, 그가 사는 타운하우스에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독서모임이 있는 데 그곳에 참가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무라카미 씨는 평소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며 "아 네, 그러시군요" 혹은 "그렇지요"하며 그럭저럭 맞장구를 쳐주는 스타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존박의 이야기가 다 끝날 때까지 말없이 듣고만 서 있었다. "그러니까 저에게 독서모임에 와 달라는 말씀이시지요?" 


무라카미 씨는 동경에서 자동차 회사를 다니다 30년 전 이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듯 그도 이곳에 오자마자 강렬한 햇살에 단박에 매료당했다. 푸른 잔디 위에 돗자리 한 장만 깔고 누우면 어디서든 스르르 잠이 들 것만 같은 화창한 날씨 탓에 사람들은 이곳을 낙원에 비유하고는 하였다. 그가 이곳에 온 지 3년이 되어가 던 해, 영원할 것만 같던 일본 경제의 버블이 꺼지고 그는 이제 그만 낙원에서 돌아오라는 회사의 통보를 받았다. 그는 지하철 안에 꽉 끼어 사무실과 집을 오가는 생활로 돌아가는 대신 탁 트인 하늘과 쨍한 태양을 언제나 누릴 수 있는 이곳에 남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모든 선택에는 대가와 책임이 따른다. 낙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든든한 회사의 명함을 버리고 한낮의 태양을 얻은 대신, 그가 그동안 사무실에 앉아서 팔아오던 자동차라는 물건의 구석구석을 직접 손으로 만지며 닦고 조이는 일을 해야 했다. 햇살의 대가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월등히 비쌌다. 그럼에도 그가 다시 동경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이곳에서 이루어야 할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원의 뜨거운 태양은 그가 깊이 묻어 두었던 소설가라는 꿈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나서기 전, 연이은 몇 번의 낙선 경험은 그를 소설가의 꿈에서 확실히 멀어지게 했지만 그렇다고 꽁꽁 숨겨두었던 불씨마저 사그러뜨리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낙원의 뜨거운 햇살 아래 서 있으면 그의 머릿속에선 팝콘이 튀어 오르듯 영감들이 솟아올랐다. 낙원은 꿈을 이루는 곳이다. 그는 이 낙원에서 이제 막 되살아난 자신의 꿈이 무럭무럭 자라 열매를 맺기를 바랐다. 십수 년 전 고향에 두고 온 노모의 부고를 들었을 때에도 그는 장례만 치르고 서둘러 낙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바빴다. 먹고사는 일과 작품 활동을 함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에게 충분한 창작의 시간을 보장하며 동시에 쪼들리지 않을 만큼의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이란 낙원에서도 흔치 않았다. 집의 크기에 따라 책상의 크기도 줄어들고 그 책상 위에서 여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도 점차 줄어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쓰고 있었고 그러기에 한 번도 스스로가 작가임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출판을 시도했다. 재외 작가란 특이함 때문에 그의 글이 일본 내의 잡지나 신문에 몇 번 실리기도 하였고 그 글들을 보고 좋은 작품이 있으면 찾아달라는 출판사도 있었지만 그의 "좋은 작품"들은 아직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 줄 안목 있는 편집자를 만나지 못했다. 


"네, 다음 주 토요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참석하도록 하지요" 이곳에서 삼십 년을 산 일본인 무라카미 씨와 한 달 전에 이곳으로 이사 온 한국인 존박은 첫 만남에 일주일 후 독서모임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였다. 이때 존박이 무라카미 씨에게 하지 않은 말들이 있다. 그의 오랜 꿈이 소설가라는 것, 낙원이라 불리는 이곳에 와 보니 이제야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것, 지금은 회사를 다니지만 아마도 여기에 남아 평생 소설을 쓰게 될 것 같다는 말이었다. 독서모임이란, 작가가 되려면 당장 무엇이라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가 그날 아침 갑자기 떠올린 생각이었다. 무라카미 씨는 그가 만든 독서모임의 유일한 회원이었고 그마저 며칠 후 적당한 변명을 둘러대며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독서모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존박이 낙원으로 온 지 일 년이 채 안되었을 때 그가 다니던 회사는 영업부진을 이유로 그와 약속했던 기간보다 훨씬 더 일찍 그를 불러들였다. 삼십 년 전의 무라카미 씨와는 달리 그는 회사의 부름에 순순히 따랐다. 그의 꿈이 그를 낙원에 남겨둘 만큼 충분히 영글지 못한 탓이었고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딸이 자기 뒤를 쫓아오며 빽빽 우는 소리가 왠지 소설가 아빠가 가지고 올 가난을 미리 원망하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동안에도 그랬듯이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자기가 원하는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와 반년이 지났다. 존박이 아직 모르는 것들이 있다. 낙원에서조차 소설가가 되지 못하는 자는 세상 어느 구석에 가도 절대로 소설가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자는 자판을 두들길 힘이 없을 때까지 세월을 기다려 봐야 헛일이라는 것이다. 


존박은 종종 할인마트에 들러 낙원에서 수입해 온 와인을 산다. 낙원의 와인을 마시고 있으면 탱탱한 포도 방울들이 머금고 있던 뜨거운 햇살이 자신의 머리 위로 내리쬐는 것만 같고 다시 한번 가슴에 묻었던 꿈들이 되살아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간혹 그 토요일 아침 낙원에서 만났던 무라카미 씨를 떠올린다. 일본어로 쓰인 문고판을 뒷짐에 쥐고 서있던 무라카미 씨는 딱 소설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존박은 아직도 그가 딱 소설가였음을 모르고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있지도 않은 독서모임이란 데를 와 달라하고. 참, 나란 놈은 막무가내로구나. 란 생각에 '큭'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큭, 크지도 길지도 않은 단음의 웃음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잠들었던 딸아이가 깨어 빽빽 울기 시작했다. 낙원의 와인은 다 비워져 가는 데, 나는 다시 낙원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애는 울고...


-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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