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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May 10. 2016

몸의 문장

인간의 굴레에서




윌리엄 서머싯 몸은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유별난 사람들은 유별나기 떄문에 특수하고 일관된 정신과 세계밖에 보여주지 못하지만

보통사람의 세계는 기이하고 다양할뿐만 아니라 모순에 가득 차서 이야기거리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자전적 소설 속 절름발이 주인공


차디찬 손발, 그것은 신에 대한 일종의 제물이었다. 그래서 오늘 밤 그는 털썩 무릎을 꿇고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불구의 발을 온전하게 만들어달라고 하느님께 진심으로 기도한다. 산을 움직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p.88 


"좀 보자꾸나" 교장이 말했다. 

"음, 고든 선생님이 네 잘못을 <매우 불손함>이라고 적어놓았구나. 무슨일이었지?"

"글쎄요. 고든선생님께서 절 절름발이 멍청이라고 부르시던데요." p.109


필립이 이제 알게 된 것은, 누구든 자기에게 화가 나면 맨 먼저 그의 불구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는 점이었다. 거의 누구도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사실로써 필립은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p.425



서머싯 몸의 두 다리는 멀쩡했다. 다만 말더듬증이 심했다고 한다. 

프랑스 태생의 그는 영국에서 공부하게 됐는데, 낯선 환경과 외국어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했다.


[ 출처 buzzfeed.com ]


흔히 그의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소설 <달과 6펜스>를 꼽는데,

청춘물, 성장물을 좋아하는 나는 <인간의 굴레에서>라는 책에 참 열심히 밑줄을 긋고 필사했다.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도

혼란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판단을 내리는 그의 모습에서 가장 순수한 인간의 영혼을 본다.


밀드레드와 그의 지독한 관계도 그렇다.

자기밖에 모르고, 허영심에 가득찬 밀드레드를 첫눈에 보고 반한 필립은


그녀에게 많은 돈을 써가며 헌신적으로 바치지만,

밀드레드는 자신의 친구와 바람을 피운다.


필립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둘이 여행을 가라고 하고, 여행비용을 지불한다.




그는 남자에게서 여자에게로, 또는 여자에게서 남자에게로 전달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중 하나를 노예로 만들어놓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성 본능이라 부르면 편리하겠지만 그것이 성 본능에 지나지 않는다면, 


왜 그것이 이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 쪽으로
강렬하게 끌리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p.127



밀드레드에 대한 필립의 사랑은 거의 사디즘에 가깝다.

밀드레드는 발을 저는 필립을 경멸하고, 혐오한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애를 낳고 길에서 매춘을 하는 걸 발견한 필립이

그의 집으로 가정부 거둬들이지만,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다. 


필립을 유혹하는데 실패한 밀드레드는 광분하며 집의 가구들을 모두 부수고 다시 사라진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전쟁 서사시로 쓰여있는 이 청년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사랑이 인내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진 재산도 모두 잃고, 학비를 대지 못해 의사가 되겠다는 꿈도 접게 된 그에게

삶에 찌든 간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동안 겪어본 바로는요,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은 생각만큼 없어요. 다 소설가들이 지어내는 이야기죠. 자살은 주로 돈 때문에 해요. 알수 없는 노릇이지만" p.273



어느 소설과 다르지 않게,

그리고 모든 인생의 이야기가 그렇듯

서머싯 몸도 인생의 허무에 대해 끝을 맺는다.


허무함과 무의미함의 굴레 안에서 인간은 노동하고,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럼에도 그는 그 속에서의 또다른 희망을 본다.


허무가 공허와 무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꺼지지 않는 열정의 미학에 대해 말한다.


생명을 살리는 의사이기도 했던 서머싯 몸은 '그럼에도' 인간을 긍정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이 오히려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제까지 자기를 박해한다고만 생각했던 잔혹한 운명과 갑자기 대등해진 느낌이 들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세상도 잔혹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실패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성공 역시 의미가 없다. p.365



그는 무의미를 발견하면서 자유를 느낀다.

자신의 불구가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더 깊은 사유의 힘을 길러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정립해보는 

그래도 살아볼만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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