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

나는 한 겨울의 후지산 보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다른 산에 가려져 꼭대기의 일부밖에는 볼 수 없지만, 파란 하늘 아래 눈이 내려 하얀 후지산을 보고 있으면 속이 뻥 뚫리는 걸 느낀다.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과 함께.


큰 아이가 6개월 즈음 우리 가족은 2세대 주택으로 지어진 시댁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베란다에서 후지산도 보인다며 자랑을 하셨다. 2층으로 이사 온 첫날. 나는 베란다로 가서 사방을 둘러보며 후지산을 찾았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방향감각이 없어서 찾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동안 짐 정리와 익숙하지 않은 육아를 하느라 바깥 풍경 따위는 잊어버리고 지냈다. 찌는 듯 더운 여름에 이사를 했는데 어느새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 되었다. 그동안 아이를 안고 진땀 빼는 일도 줄었고, 포대기로 업는 것도 익숙해져서 집안일도 곧잘 했다. 천성이 그런지 어릴 때부터 익숙하지 않은 길은 찾느라 애를 먹었는데 집 주변의 길을 익히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덕분에 첫겨울은 집에서만 보내느라 바깥 풍경을 본 기억은 없고 집 안이 바깥보다 추워 냉장고 같다고 생각했던 것만 기억난다.


아이가 크는 것과 동시에 나도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졌다. 제법 길 눈도 밝아져서 버스 타고 20분 걸리는 역까지 아이와 손을 잡고 산책 겸 걸어 다니기도 했다. 예전에는 밖을 나가도 아이를 안고 다니느라 혼자 화장실 가는 것도 익숙하지 않아 급하게 볼일만 보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버스를 타도 창밖을 보기보다 내 품 안에 아이를 보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커서 혼자 걷기도 하고 여유가 생기니 주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 근처는 의외로 나무와 풀들이 많았다.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큰 공원이 있기도 하고, 원래 산이었던 지형이라 그런지 근처에 야트막한 산도 있었다.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심어진 은행나무 가로수도 운치 있었다. 계절마다 다양한 꽃들이 피고 지는 것도 알게 되었다.


큰 아이가 유치원에 갈 무렵, 둘째가 태어났다. 초강력 엄마 껌딱지인 큰 아이는 유치원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동안 안거나 업고 다녀야 했다. 낑낑대며 둘째를 안고 첫째를 늘 가던 길이 아닌 언덕길을 걷던 때였다. 문득 고개를 드니 멀리 후지산이 보였다. 내쉬는 숨에 하얀 김이 폴폴 나서 아이와 용 같다며 서로 깔깔대다가 저기 좀 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 언덕길은 슈퍼 가는 길에 종종 걷는데 이제껏 왜 못 봤을까. 그러고 보니 시어머니가 집에서 후지산이 보인다고 했었는데 베란다가 아니라 여길 말했었나 보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떠오르듯 하얀 산꼭대기를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쉬니 몸 구석구석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알고 보니 언덕길이 아니어도 유치원 버스 정류장을 가기 위해 큰길로 나가는 곳에서 왼쪽을 돌아보면 볼 수 있었다. 늘 지나다니면서도 몰랐다. 우리는 겨우내 오늘 아침엔 후지산이 보일까 두근두근 대며 그 길을 지나다녔다.


봄이 오고 땅에서 따뜻한 공기가 올라올 무렵이 되자 늘 돌아보던 그곳엔 구름이 끼어 희뿌옇기만 했다. 나뭇잎이 파랗고 무성 해지는 여름이 지나고 울긋불긋 해지는 가을이 지나고 잎을 우수수 떨어뜨리는 바람이 부는 추운 계절이 돌아왔다. 그러자 다시 그곳에서 후지산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둘째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는 길에 함께 하얀 꼭대기가 보이는지 찾는 것이 아침 일과의 하나가 되었다.


나는 오늘도 둘째의 손을 잡고 시원한 바람을 한껏 들이마시며 새하얀 옷을 입은 산꼭대기를 찾아볼 것이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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