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훨씬 좋은 남자 만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처음으로 외박을 했던 날은 첫 남자 친구에게 차인 날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녹차라테의 얼음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10분도 안 되어 이별을 통보받았고, 잘 살라는 말을 남긴 그놈은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갔다. 멍하니 앉아있던 나를 카페에서 구출해 준 건 근처를 지나가던 한 친구의 연락이었다. 친구 둘은 " 나 헤어짐"이라는 문자를 보자마자 10분도 안 되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친구들의 얼굴에는 "그 새끼 정말 도라이 아니냐?, 너 괜찮아?"라는 글씨가 궁서체로 쓰여있었다. 나보다 더 화가 나 보였고, 그 마음을 마주하자 눈물이 쥬르륵 나기 시작했다.
"야 안 되겠다. 오늘은 우리랑 같이 있자. 우리 집에 가자."
친구의 원룸에는 강아지 두 마리가 있었다. 강아지들은 친구가 들어오자 반갑다는 듯 이리저리 돌며 인사를 했다. 친구는 들어오자마자 강아지들에게 뽀뽀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강아지 간식을 꺼내려 서랍장을 열던 친구가 내게 말했다.
"야, 야 됐어 됐어. 똥차 가고 벤츠 온다고. 훨씬 좋은 남자 만날 거니까 걱정 마."
정말?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 사람도 처음에는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똥차를 다시 안 만 날 수 있는 방법은 뭐야? 말을 내뱉으며 눈물도 뱉었다. 그때, 침대에 기대앉아 핸드폰을 하던 친구 2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냥.. 남자를 안 만나는 거?"
생각지 못한 답에 당황스러웠지만, 그 친구의 말은 내 가슴 깊숙한 곳에 들어와 오래도록 빠져나가지 않았다. 다시는 똥차를 만나면 안 된다는 생각은, 곧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인생의 목표이기도 했다. 때문에, 실제로 몇 년 동안은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긴 금욕 카드를 가슴에 달고 살았다.
그렇게 혼자 잘 먹고 잘 살던 어느 날, 불쑥 새로운 남자가 튀어나와 내 마음에 박혀있던 금욕카드를 천천히 빼가기 시작했고, 결국 그 남자에게 카드도, 내 마음도 주었다. 그리고 그와 연애를 한지 정확히 1년 뒤, 나는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똥차 유형 중 탑 오브 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첫 번째 이별 때 보다 더 허망하고 슬펐다.
이번에도, 업데이트된 똥차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 중 대부분은 욕을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다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미친놈이다, 완전. 미친놈이야."
"어떻게 그딴 더러운 짓을 하냐, 그게 인간인가?"
"야, 못 참겠다. 회사라도 쳐들어가야 되는 거 아냐? 같이 가줄까?"
"진짜 길에서 만나면 내가 다 따지고 싶다, 미친."
우리에게는 더러운 짓을 한, 인간도 아닌 미친사람이었지만, 우리는 결코 회사에 찾아가지도, 그 더러운 일을 소문내지도, 길에서 만나 따지지도 못했다. 이번에는,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조상님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계획대로라면, 첫 번째 똥차를 겪었으니 이제는 벤츠를 만날 차례인데 나는 왜 또 똥차를 만나고야 말았는가. 법칙처럼 내 인생의 똥차를 만나야 하는 횟수가 정해져 있는 걸까? 두 번은 건너뛰어야 벤츠를 만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당시 나는 만나는 친구마다 똥차 썰을 풀었다. 그저 공감해주고, 같이 욕해주기만 해도 마음이 풀렸다. 대부분은 무조건적인 위로를 해주었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내게 화살을 쏘았다.
"야, 근데 너 남자 보는 눈 어떡하냐. 왜 그러는 거야"
친구의 말을 듣자마자 -정말 내게 왜 그러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친구를 쳐다봤다. 맞는 말이지만 무례한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또 맞는 말 같아서, 화를 내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메모장을 열어 지나간 순간들을 곰곰이 떠올려봤다. 지나간 나의 똥차들의 이력과 경험담을 써 내려가다 보니 문득 흐릿했던 정답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Q. 본인이 왜 연속으로 똥차를 만났는지에 대해 서술하시오.라는 문제가 시험에 나온다면, 나는 교수님의 마음과 눈물을 훔쳐 당당히 A+을 받으리라. 손가락은 작은 핸드폰 위를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지금 든 이 감정, 생각을 꼭 적어놓고 다시는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목적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마지막 정리를 끝냈다. 그리고 반성했다. 무조건 이번에는 똥차가 잘못한 것이긴 했지만, 똥차를 피하지 못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나에게서 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첫 똥차와 두 번째 똥차는 분명 공통점이 있었다. 연애 초기, 상대방이 어? 이거 뭔 상황이지? 하는 순간을 주기적으로 만들었으나, 나는 항상 "어? 이거 그냥 넘겨,넘겨!"하며 똥차를 빵 차 버릴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디서 맡아본 똥냄새를 맡고도, 이번에는 그 똥 안에 로또가 숨겨져 있을지 몰라하는 그릇된 기대를 가진 게 문제였다.
이번에는 좋은 남자를 만나야지 하는 추상적인 목표를 가진 채로, 이성 버튼을 끄고, 감정 버튼만 눌러대며 여기까지 온 거였다. 사랑에는 적당한 이성과 감정이 함께 해야 했는데, 나는 그냥 끌리기 시작하면 상대방 페이스에 맞추어 움직였던 소극적인 연애 대표선수가 되어 있던 탓이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달라지지 않은 나의 태도가 큰 문제였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말은 틀렸다. 똥차 가고 더욱 강력해진 슈퍼 똥차가 올 수도 있으니, 우리는 경계하는 마음으로 이성적으로 똥차를 피하기 위한 준비운동을 해야 한다. 혹여나 또다시 똥차에 탑승했다 하여도, 중간에 벨을 누르고 하차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구린내 나는 똥차를 멈출 수 있다.